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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Mar 25. 2020

그린 북 : 당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들

그러니까 이건, 선택의 이야기

Green Book, 2018

감독 피터 패럴리 출연 비고 모텐슨, 마허샬라 알리


Green Book. Negro motorists. For vacation without aggravation.

1960년대 미국을 여행하는 흑인이 출입할 수 있는 식당과 숙소 등이 표기된 여행 가이드북.


이탈리아계 백인 토니는 수입이 없어 고민하던 차에 보름 간의 운전 기사 일을 제안 받는다. 상대는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 그린북은 부와 명예를 누리지만 피아니스트로서의 삶과 흑인으로서의 삶이 나뉜 듯 세상의 모순된 시선에 갇힌 돈 셜리과 거칠 것 없이 말하는 대로 사는 토니의 동행 이야기다.



.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다면 그럼 난 뭐죠?”


1960년대, 미국의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는 물음은 나를 울린다. 부와 명예를 누려도 백인과 함께 할 수 없고, 흑인 사이에서도 별종이라 여겨지며, 성소수자인 그가 설 자리가 있느냐고. 보름 간의 여정에서 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편견과 폭력을 마주하며 토니가 점차 돈 셜리의 입장에 서게 되고, 돈이 토니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이 보여주는 버디무디의 공식 같은 변화는 결코 영화의 전부가 아니다. 영화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주기 보다는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 사이의 방황을 보여준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삶과 

당신의 언어가 드러내는 삶의 깊이



. “저들은 들어올지 말지 선택할 수 없었지만, 당신은 할 수 있었어요.”


돈은 토니를 저녁 만찬에 초대하지만 토니는 저택 밖에서 다른 잡부들과 함께 게임을 즐긴다. 돈은 당신에게는 그들과 달리 선택권이 있었다는 말을 한다. 돈의 대사는 화면 밖으로 나온다. 단지 그날의 저녁 식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졌던 무수한 선택의 기회를 돌아보게 한다.


영화 속 토니는 단순히 '백인'이 아니라 해결사에 가깝다. 사람들은 토니에게 '해결'해달라며 말을 건넨다. 토니가 거침없고 단단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기준이 때문 아닐까. 삶의 기준을 무엇으로 세울 것인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낸다. 가치를 어디에 두는지, 그것이 진정으로 삶에 뿌리내리도록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이곳에서의 선택은 기존의 삶을 고수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택하지 않고도 여전히 머무를 수 있음이기 때문이다. 선택은 필연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이태원 클라스에서 박새로이는 "마음 먹었으면 그 마음에 충실해." 말한다. 변화는 우리를 연약하고 새로이 정립되어야 하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선택해야하는 것이 많아질 수록, 그리하여 판단하기 위해 고민할수록, 세계와 맞닿은 우리의 가장자리는 유연하고 튼튼해진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는 새로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움직이며 쌓이고 쌓여 단단해지는 것뿐이다. 




. 당신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영화는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돈 셜리는 음악가로서의 삶을 택한 뒤, 편견을 깨기 위해 차별이 심한 남부로의 투어를 결정한다. 다만 기존 관습이 깨지도록 부추길 사건의 원인과 결과, 행동에 따른 보상을 확실히 보여주는 방식으로서의 단순한 쾌감을 극대화하는 대신, 당신의 세계는 어떤 것들로 이루어져 왔는지 묻는다. 당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을 간과하고 살아오지 않았는지, 오래도록 쌓아온 선택이 지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돈 셜리와 토니 발레롱가는 부당한 대우와 편견에 맞서는 대신 마지막 공연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린다. 편견에 부딪히는 통쾌한 해결이 가져다주는 고정된 쾌감보다, 여태 영화가 끌고온 질문과 답을 그다운 소박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해결이 최선의 선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선택은 단순히 장벽을 깸으로서 삶을 움직이지 않는다. 어디로 향하고 싶은지, 무엇을 소중히 두고 있는지 묻는 과정을 요구한다. 선택은 나를 만들고 구분짓는 가장자리를 그어가는 일이지, 이기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흑인을 가로 막는 식당에 맞서싸우는 대신 캐쥬얼한 식당에서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 나를 돌아봤다. 맞서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까지 선택을 무기처럼 사용해 싸워오지 않았는지를. 한 사람을 이루는 것은 그를 가로막는 것들을 향한 단순한 투쟁이 아닌, 그가 원하는 삶의 모습과 그것을 향해 가기 위한 기준과 가치관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시간이다. 돈 셜리는 품격을 지킬 때에만 폭력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품격은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돈은 무엇이 '옳다'고 정의 내려야만 했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지키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안에는 '소중한 것'이 결여되어 있는듯 보인다. 소중한 것을 구분하는 능력은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것들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토니는 영화의 시작부터 해결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일을 제안받지만 그의 기준은 단순했다. '가족'과 '약속'. 토니는 편견을 깨기 위한 영웅적 도구로서의 캐릭터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지켜내는 인물로 그 가운데에는 '가족'과 '약속'을 지킨다는 선명한 중심이 있다. 선택은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닌 지켜내기 위한 방향이다.  



. 당신의 언어와 태도가 곧 당신이다.


“Eyes on the road, Tony.” 

“P.S. 아이들에게 키스해줘.”


영화에서 반복되는 대사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무언가로 들렸다. 정도를 지키며 나아가는 것과 소중한 것의 우선순위를 잃지 않는 것. 기준이 없는 사람은 늘 흔들린다. 자신만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정도껏'을 가늠하지 못한다. 선을 가진 사람은 그보다 더 큰 선택에도 망설이지 않는다. 본질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영화는 큰 선택과 작은 선택을 줄 지어 비교하라고 강요하는 대신 두 사람의 언어가 맞닿는 지점을 보여주며 우리가 상대를 무너뜨리지 않고도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들의 여정 초반에 들른 식당에서 돈은 토니에게 맛을 묻는다. 겨우 짜다고 답한 토니를 비꼬던 돈은 언젠가부터 토니가 돌로레스에게 보내는 편지 쓰기를 돕는다. 언어는 보이는 것을 전부 담아내진 못하지만,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의 크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그린북을 처음 접하고 토니와 돌로레스는 이런 게 (왜) 있느냐는 대화를 나눈다. 언어의 한계는 이렇듯 종종 경험의 한계를 뜻하기도 한다. 한 사람을 인생에 들이는 결정으로 그들에겐 다른 세계가 보인다. 당신의 언어가 커질수록 세상은 입체적으로 변한다. 토니는 돈을 만나 언어가 가진 힘을 느끼고, 그의 선택이 가진 영향력의 크기를 인식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당신을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뭘 하든 완벽하게 하랬어요. 일할 때는 일만 하고, 웃을 때는 온전히 웃으라고.”


우리가 생각하던 완벽은 완전한 허영인지도 모른다. 토니가 카네기 홀 위에 위치한 돈의 공간에 들어섰을 때와, 마지막 장면에서 돈이 토니의 집에 들어섰을 때의 카메라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넓고 치장된 돈의 공간에서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전경을 겨우 담아내던 화면은 토니의 집에선 사람과 관계를 힘껏 당겨 그들의 표정으로 가득 채운다. 완벽하게 웃는 모습을. 이번이 마지막인것처럼 웃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잘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의 세계는 넓고 크다.


“World’s full of lonely people afraid to make the first move.”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은 외롭다. 편견을 깨기 위한 발걸음도, 사랑을 고백하기 위한 목소리도 가둬둘수록 스스로가 외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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