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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Mar 30. 2021

좋은 씨앗을 가진 사람

아빠와 나

좋은 씨앗을 가진 사람

재은



가끔 엄마는 아빠를 너무 좋아한다는 생각을 한다. 아빠가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내 팔자가 필 것이다. 타인이 내 팔자를 펴준다는 생각 자체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배우자가 줄 수 있는 행복이 있다면 엄마는 분명 그것을 누리고 사니까.


친구들의 부모님을 뵐 일은 잘 없지만 아빠는 내 친구 대부분을 만났다. 아빠를 만나본 친구들은 종종 아빠 이야기를 꺼내면서 좋으시다 하곤, 다른 어른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친구들 부모님이나 애인의 부모님을 만나거나 밥 먹는 자리가 생겨도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건 어려워야 하는 일이 아니니까. 권위나 자식의 꿈을 좌우하는 부모의 모습은, 나는 어느 정도 공감하지 못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방탄소년단이 <놀면 뭐하니?>라는 예능 프로에 나온 뒤에 멤버 뷔의 아버지가 화제가 된 모양이었다. 뷔는 아빠를 많이 닮고 싶고, 꿈이 아빠라고 했다. 바람직하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는, ‘우리 아빠도 이런데?’하고 말았다. 나는 아빠 같은 남자랑 결혼할 건데. 한 언니는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든 걱정 없다고 말했다. 너는 이상한 남자랑 결코 잘 될 수 없을 거라고. 괜찮은 남자랑 30년을 살았는데, 나쁜 남자랑 살 수 있겠냐고.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은 내 자부심이기도 하다.

   한 친구가 우연한 기회로 우리 집에서 자고  날에, 마침 아빠도 집에 계셔서 함께 식사하고 드라이브하며 저녁을 보냈다. 어느날에 친구는 아버지  지내시냐고 묻곤, 그날 이야기를 했다. 조금 특이한 일을 하는 탓에 어른들의 노골적인 조언이나 질문을 힘들어했는데, 그때 너희 아빠 같은 어른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자신의 상황을 배려해주시는  같았고, 겪어보지 않은 것을 함부로 판단하고 이야기하지 않으셨다고. 같은  이른 시간에  다른 친구가 우리 아빠 이야기를 했었다. 아버지는 너라는 사람을 이해하시는  같다고.  친구는 10  나를 만난  얼마  됐을 무렵에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난다고 말했다.  떳떳하고 자기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지금도 그래 보이나. 그랬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을 너무 깊고 넓게 알고 있다면 설명하긴 점점 어려워진다. 인간은 복잡하고 모순된 존재이기도 하고, 시간을 압축하는 단어는 없기 때문이다.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아빠는 조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서럽게  날에야 이런저런 제안을 했을 뿐이었다.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 나를 달래듯이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들을 읊어줬다.   미친 듯이 해보면 되지  걱정하냐고. 무엇이든 허락해주는 아빠는 아니었지만  대화하는 사람이라는 믿음 덕분에 나는 위축되거나 쫄지 않고 무엇이든 당당하게 말해볼  있었다. 아빠는  말이 가치 있다는  알려주고,  의견이 타인의 무시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가르쳤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시의 구절이 있다. 나에게는 꿈이 아니다. 나는  생각과 감정에 당당해도 된다는  안다. 그리고 아빠가 가르쳐준 대로 그게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고 조언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 이기적인 행동을 용인하는  아니라는  안다.

    나는 아빠의 허물없음과 부드러움을 좋아한다. 작은 허물로 장난을 쳐도 웃으며 받아주는 아빠는 내가 잘 다루지 못하는 감정을 두고 네가 엄마랑 아빠에게서 보지 못한 부분이라 그렇다는 말로 나를 감싸 안았다. 엄마 아빠가 잘 못하는 거니까, 너한테도 익숙하지 않을 거라고. 부모가 힘든 얘기를 잘 안 하니까 네 마음에 그런 게 쌓여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잘 몰라서 참아야 하는 줄 아는 것 같다고. 아빠는 나를 자주 구원하고 내 조급한 삶의 속도를 늦춘다. 본인의 허물을 들춰야 한대도.


아빠는 선택은 네 몫이라고 했다. 아무도 대신 책임져주지 않으니까. 한 번은 스쿠터를 타고 싶다는 내 말이 당돌하고 위험하게 들릴까 봐 "타도 돼?"라고 물었는데, 아빠는 허락이 필요한 일은 아닌 것 같으니 네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그래야 하지 않겠냐고 답했다. 언제나 그랬다.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배워, 공부를 더 하고 싶으면 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뛰어들어도 돼. 네가 열심히 할 의지만 있다면 아빠가 부자는 아니어도 어떻게든 지원해줄게. 나는 자유로운 선택을 하되, 그 영향을 가늠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믿음과 책임의 씨앗이 조화롭게 뿌려진 덕분에.

    엄마가 걱정과 불안에 나를 뜯어말릴 때면 아빠는 엄마가 당연히 안된다고 할 거 몰랐냐고, 뭐하러 다 말하냐고 한다. 하지 말라면 안 할 거냐, 부모가 안된다고 해도 바락바락 대드는 애들이 있지 않냐고. 너도 그러라고, 아빠는 꼭 부모가 아닌 것처럼 말한다. 우리 사이가 처음부터 오늘과 같았느냐면 그렇지는 않다. 아빠가 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내가 학교에 갇혀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될 무렵부터 나는 그냥 아빠가 가장 친한 친구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근데 이제 내가 어리광 부리고 약한 소리 하면 다 대신해주고 밥에 커피까지 사주는.


나는 어른을 좋아한다. 좋아한다기보다 어렵지 않다. 선배든 꼰대든 좀 귀여워하는 편이다. 아빠가 귀엽기 때문이다. 내가 아빠보다 키도 더 크다. 어릴 때부터 어른을 귀여워하며 자란 나는 꼰대들도 그냥 그 행동이 빤하고 귀여운 거 같다. 내 위로는 몇 살이든 비슷하게 느껴진다. 회사 다닐 때는 이사님과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둘 다 지옥의 숙취인 것을 서로 알아보고는 업무 시간 중에 몰래 해장하러 다녀왔다. 이사님과 나간 건데 핑계도 확실, 맑은 대구탕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서점을 을지로 세운상가에서 할 때는 머리가 새하얀 경비 아저씨들이랑 친했다. 도서관처럼 책을 빌려주고 시시콜콜한 안부를 묻고 나누는. 부모님의 권위가 높지 않은 것이 무조건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덕분에 권위 없는 사람으로 크고, 격식 따지지 않는 부드러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바라기도 한다.



계속 들여다보아도 충분하지 않은 기분. 아빠를  편의 글에  담을  없고, 부모 사랑의 팔불출이  당위를 잃을  같다. 좋은 아빠가 많다는 것을 안다.  모양이  다르다는 것도. 아빠의 씨앗이 나에게 조건 없이 뿌리 내리고 곧게 성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순히 좋은 씨앗이 좋은 나무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아빠의 부모님은 아빠와는 무척 다른 분들이다. 어쩌면  가운데 아빠의 뿌리가 깊고 몸통은 유연해졌는지도 모른다. 나도 아빠와 다르다. 잔가지가 많은 나는 몸통이 연약할지리도 아빠의 씨앗 덕분에 뿌리가 깊은 사람이다. 좋은 씨앗이 좋은 나무를 보장하지는 못하더라도, 좋은 나무를 보고 자랄  있어서  좋은 삶을 가늠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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