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도 성장도 요원하다
다짐의 왕, 이번엔 퇴사를 결심했다. 사직서를 언제 제출하게 될지 모르겠다. 이사 갈 집이 구해지는 대로 사직서를 낼 것이다. 퇴사 후 플랜을 조금씩 세우고 준비하고 윤곽이 드러나는 대로 완주를 떠날 예정이다. 2015년 8월에 왔으니 올해로 5년차, 그동안 애썼네.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정하진 않았다. 어렴풋한 계획만 있다.
첫 해는 행복했고 두 번째 해는 괴로웠다. 회사를 그만두고 일 년쯤 즐겁게 지내다가 진로탐색을 위해 자격증을 땄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카페 아르바이트와 팟캐스트 제작으로 기운을 좀 내다가 직업 페미니스트로 살아보고자 성평등 관련 센터에 취직했다. 입사 후 5개월 차에 행사를 잘 치러냈던 날, 한 번 정도 보람차고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 여행을 다녀와 바로 우울해졌고 겨우겨우 상담 다니며 헤어 나왔다. 직장은 월급 나쁘지 않고 여성 인권과 평등한 세상을 위해 일한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이니 어디다 말하기 부끄럽지 않은 정도였다.
완주생활 2~3년에도 남는 게 없어서 전주로 생활무대를 옮겨본 건데 전주에서도 결국 적응 실패다. 구성원이 십수년 째 그대로인 지역사회의 운동조직들을 옆에서 보면서 딱히 배울 건 없구나, 신입 실무자들의 아이디어와 열정을 대상화하면서 지금의 위치에서 최대한 보수적으로, 하던 대로만 일하려고 하는구나, 불합리한 구조와 도태되어가는 조직문화를 바꿔보려고 노력했던 동료들이 결국 싸우다 지쳐 퇴사했다. 떠난 사람들을 불편해하면서 불이익을 주는 걸 보니 더 이상 이곳에 내 애정을 쏟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판단했다. 부끄럽고 부정의한 일이 행해지는 걸 보고 있기가 괴롭다. 이번에도 역시 내가 떠나야 한다. 이런 곳에 적응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살아야지. 나는 괴로워서 안 되겠다. 처음에는 말이 통하는 줄 알고 문제 제기도 해보고, 잘 해보자고 마음도 먹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일이나 열심히 해서 내 경력이나 챙기자고 생각했는데 승진도 성장도 요원하다. 결정권이 내게 없으니 재미있는 일도 할 수 없다. 이미 내가 눈밖에 나버렸기 때문에 이제 더욱 나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한다. 원래도 감독기관인 시에서 싫어하는 건 하려고 하지도 않고, 해도 되는 걸 지레 겁먹어서 하지도 않고, 남이 한 것만 안전하게 하려고 한다. 민간의 전문성을 가지고 운영을 위탁받은 것이 아니라 공무원이 바빠서 넘긴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아님 공무원이 되고 싶던가. (말로는 싫다고 한다) 자신의 안위와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이득이 돌아가는 일만 한다. 야망을 가지거나 욕심을 내거나 진영의 입지를 넓히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지금 가지고 있는 딱 그 정도의 월급과 명예와 지위만 가지면 되니까. 야망을 가진 여자 후배들에게는 겁을 주면서 지금 이 자리도 어렵게 지켜왔으니 자기만 믿고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젊은 남성들이 기세를 넓혀 자기 자리를 넘보면 좁아진 자리는 여성후배들의 자리를 빼앗아 채울 셈인지. 직장 내 성희롱과 따돌림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에서도 전형적인 사용자 입장인 점이 실망스러웠다. 여성운동을 해왔다는 사람들이 본인들이 관여한 문제에서 결국 누구 편을 들고 있는가를 보니 실망스러움을 넘어 분노를 참지 못하겠다. 신뢰하고 존경할 만한 선배를 찾고 싶었던 게 욕심이다. 나 스스로 나로 살면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5월부터는 회사욕은 그만하고 퇴사 후 플랜에 대해서 생산적인 고민을 하려고 했는데, 오늘 또 하고 말았네. 오늘까지만이다. 내일부터는 재미있는 계획과 다짐을 주로 더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