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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Jun 24. 2020

아프지만, 아파서 서럽고 슬프지만, 우울하지는 않다.

빨리 낫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언젠가 나아지기만 했으면 좋겠다.

어지럽다. 오늘도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했다. 아침에 조금 일찍 출근했는데 딱히 업무를 할 건 없어서 휴게실에 좀 누워있다가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이 청소니 뭐니 부산스럽게 굴면 나 혼자 누워있기가 힘들 것 같아서 차에 누워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9시 5분쯤 깨서 부랴부랴 사무실로 들어갔다. 팀장에게 아무래도 몸이 힘들어서 할 일만 알아서 처리하고 근무시간은 유연하게 조정하겠다고 말했고 그러라는 허락을 받았다. 오전에 회의 한 건 하고, 처리할 일을 처리하고 집으로 왔다. 비가 꽤 내렸다.


2주전쯤 친구가 자동차 브레이크 등이 나간 것 같다고 교체하라고 알려줬는데,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전구를 사서 직접 갈아보고 싶은데 전구를 사려면 카센터나 대형마트에 들러야 했고 그럴 시간이 잘 안났으니까. 무엇보다 기력도 없고. 그래서 오늘 퇴근하는 길에 그냥 다니는 카센터에 들렀다. 그러고 보니 엔진오일 교체할 때도 된 것 같아서 겸사겸사 처리했다. 역시나 브레이크 등 가는 건 너무 쉬워보였고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전구를 사는 게 일이네.인터넷에 사면 하나에 2~300원하고 배송료가 2천 5백원이드라고. 마트에서 2개에 3~4천원 한다 그래서 사볼까 했었는데...다음 기회에. 지금은 밥해먹을 기력도 없어서 빌빌 거리는 데 뭘.


카센터에서 한 시간 정도 소요되었나, 집에 오니 정말로 급 피곤. 점심 먹을 생각도 못하고 씻고 바로 누워서 두 시간 잤다. 겨우 정신이 나서 밥을 챙겨먹었다. 그냥 좀 몸이 피곤해서 그런가보다 하면서 쉬어주고 있는데 덜컥 겁이 났다.


나 정말, 어디 크게 아픈 건 아닐까. 이렇게 계속 잠이 오고, 하루에 서너시간 밖에 버틸 힘이 없다는 게 말이 돼?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잖아. 노화란 이런 것이겠거니 하면서도 너무 갑자기 이러니까 정말 큰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 다음주에 서울에서 강의 들어온 것도 하나 있는데 평소 같으면 오전 근무하고 반차만 내고 다녀와서 다음날 첫차타로 내려와 바로 출근했겠지만 이번엔 절대 그렇게 못할 거 같으니 당일과 다음날 이틀을 휴가로 내야겠다.


회사가 병가도 주고, 재량껏 유연근무하게 해주는 거 고마운데, 이걸 고마워하는 내 마음이 좀 짜증난다. 사람이 아프면 쉬고, 쉬엄쉬엄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일할 수 있게 하는 게 당연한 건데 이런 대접을 기대조차 하지 못하니까 너무 생경해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든다. 큰일은 아니겠지. 이렇게 쉬엄쉬엄 지나다보면 괜찮아지겠지?


유독 여름에는 우울하고 기운도 없었으니까. 이번 여름도 그런 거랑 관련이 있을 거야. 2년 전에 주짓수 도장에 다니다가 어깨를 다쳐 거의 두 달 내내 밥도 제대로 못 지어 먹고 매일매일 한의원과 정형외과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날이 생각났다. 너무 덥고 배가 고파도 밥도 못 지어 먹어서 병원 옆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사먹었다. 돈도 많이 벌 때가 아니라서 언젠가 가격표를 보면서 마음편치 않게 먹었다. 3,900원짜리 베트남 쌀국수를 제일 많이 먹었다. 맛있어서라기 보단 저렴하게 그냥 한 끼 해결할 수 있어서. 갑자기 그 때 생각을 하니 서러워서 눈물이 나네. 지금은 그래도 치킨도 고민 없이 시켜 먹을 수 있고, 원한다면 소고기도 구워 먹는다. 그때처럼 정말 너무너무 아픈것도 아니니까. 다행이지.  


엄마에게 병가로 일주일 쉬었다는 말을 굳이 안 하다가 집에 오시겠다고 하는 통에 많이 아픈 건 아니고 혹시 전파자가 될까 병가내고 쉬었다고 하니 걱정이 되시는지 이제 좀 괜찮냐고 물어보신다. 힘들어서 단축근무하고 있다고 하면 또 걱정하실테니 출근 잘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울컥 서럽다. 이 두려움과 답답함은 어떻게 잘 관리해야 하는 걸까. 혼자 알아서? 엄마는 나의 불안이나 스트레스를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도 어렵게 설명해야 하고, 가까운 곳에는 나를 간호해줄 친구도 없다. 이러다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건 아닐까 두렵지만 아닐 거야 하면서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몸이 아프고 기운이 없으니 회사에서 상사에게 스트레스 받았던 때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뭐가 그리 중요해서 아등바등 댔을까. 그렇지만 그땐 그게 가장 큰 고통이었던게 분명하니까. 지금도 회의를 하면 아주 답답해서 속이 타들어가고 화가 나지만 그러려니 하고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말뿐이 아니라 정말로 너무 피곤하고 기력이 없어서 그런 데다가 쏟을 에너지가 없다. 얼토당토 않은 의견에 말을 섞을 기운도 없고 화를 낼 힘도 없다. 그런갑다 하고 내 일만 겨우겨우 해낸다. 뭐,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언젠가 전처럼 기운 넘치는 나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은 있었으면 좋겠다.


밥을 먹고 휴대폰으로 만화를 조금 보다가 멍하니 앉아있다가 어쩌다보니 저녁 시간이 되었다. 8시가 넘도록 밖에 환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정말 기운이 없어서 그런 데 마음을 쏟을 여력도 없었다. 겨우겨우 책상에 앉아 오늘의 일기를 쓴다. 공책에 쓰는 일기는 지난 병가 기간에도 거의 쓰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기록을 남겨둬야 한다.


https://youtu.be/q16Uir3Kn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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