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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May 24. 2024

시작하는 마음에 대하여


5월 23일 성모병원 오거리에 있는 드림아트홀에서 <아우디레> 첫공연을 보았다. 별도의 대기 공간이 없어서 입장 전까지는 극장 앞 길가에 서성여야 하는 불편한 장소지만 의외로 그 앞을 서성이는 관객의 면면이 연극적이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웅성웅성 모여 담배를 피우는 사람 중에는 필시 관계자의 동료도 있을 터다. 묘하게 티가 난다. 그날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 여럿이 단체 관람을 왔는지 입구에서 예술감독인 남명옥 배우가 연극에 대한 이야기 중이었고, 얼핏 보기에 야외 수업 혹은 현장 학습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공연 시작 15분전부터 관객 입장이 시작되었다. 임은총 연출이 누군가에게 받은 꽃다발을 들고 입구에 서 있었다. 배우로 활동하던 이의 첫 연출작이라 했다. 나는 임은총 배우를 2022년 1인극 페스티발에서 처음 보았고, 2023년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햄릿_그녀로부터>에서도 보았다. 조금씩 인연을 맺고 과거의 작품들과 연결시켜 보는 재미도 특별했다. 작품에 중요한 의미로 등장하는 <여름과 연기>는 2022년 임은총이 1인극에서 다루었던 텍스트다.


팸플릿을 살펴보니 김선옥, 전아라, 최한솔 배우도 몇 번씩은 다른 작품에서 만나본 적이 있다. 특히 김선옥 배우는 <햄릿_그녀로부터>에서 그림자를 포함해 다양한 배역으로 짧게 여러 번 등장했는데 몸을 잘 쓰는 배우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번 극에서는 판소리를 비롯해 사소한 언짢음, 진한 후회와 깨달음, 특정 인물 혹은 연기 자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강한 감정을 표정에서 많이 읽었다. 응축된 에너지가 터지는 듯했다. 전아라 배우는 음색을 비롯한 특유의 쾌활함이 캐릭터와 잘 어울렸다. 최한솔 배우는 <알래스카 교도소>와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에서 봤을 때, 모범적으로 연기하는 안정적인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고 동시에 비범한 느낌이었다. 조금은 코믹하면서도 진지한 이번 작품의 배역에 잘 어울렸다. 김은혁 배우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내가 처음 만나는 배우라 그랬는지 과하게 열정적이고 세상 두려울 것 없는 지한 그 자체인 것 같았다. 소극장이라 배우들이 흘리는 땀방울이 매우 잘 보였는데 발로 쿵쿵 무대를 울릴 때,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춤을 출 때, 무대 이쪽 저쪽을 빠르게 뛰어다닐 때 흐르는 땀이 무척이나 뜨거워 보였다.


<아우디레>는 최종 오디션의 대기실이 무대다. 작품을 쓰고 연출한 임은총이 그간의 배우 생활에서 느끼고 생각한 바를 담아냈을 터다. 무대와 작품을 씹어먹을 듯한 기세로 달려드는 지한, 자신이 선택한 이 길에 가족을 포함한 타인의 인정을 곡 받고 싶은 백설, 과거에 했던 작품이지만 새로운 도전으로 오디션에 임한 이호, 연출가에 대한 팬심으로 꼭 이 작품에 서고 싶은 민정까지 경력도 배경도 다른 네 명의 배우는 이 작품을 연출한 임은총을 비롯해 모든 배우들의 경험과 감정으로부터 조금씩 만들어졌을 것이다. 배우로 활동하면서 작품의 해석과, 연출과의 관계와, 예술가로 살아남기 힘든 팍팍한 현실과 그럼에도 그럼에도 좋은 작업을 하고 싶은 꿈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자기 삶을 자기답게 꾸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창작자의 첫번째 작업은 자전적 이야기가 많다. 기실 창작자의 모든 작업은 결국 자기의 이야기다. 자신의 기억과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예술에 관한 질문, 동료에 관한 질문, 미래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힘이 세다. 임은총이 던진 질문은 배우가 아닌 사람에게도 울림을 준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분명 우리는 모두 고민을 하고 있다. 잘 하고 있나, 계속하는 게 맞나, 어딜 향해 가고 있나, 곁에 누가 있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같은.

집에 돌아온 뒤에도 마음이 쉬 가라앉질 않는다. 보름달이 훤하게 뜬 밤이었다. 나를 뽑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지한처럼 패기로 가득 차지도 않은 상태고, 오디션 장에서 경쟁과 불신과 의심을 걷고 적당히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장면처럼 세상이 다정하지만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작업을 계속하는 힘, 혹은 일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힘에는 내 안의 동력 외에 주변으로부터 얻는 힘이 있다. 오디션 장에서의 잠깐 스치는 경쟁자들에게서까지도. 업계 동료, 크게 보면 시민, 지구인.


시작하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모두에게 흥미로울 것 같다. 배우가 꾸린 내용이라 그랬을까. 극의 내용에 필요했던 특기는 실제 배우들의 특기였을까 궁금하다. 이번 공연에 그치지 않고 판소리와 아크로바틱, 크럼프 댄스 외에 여러 배우들의 다양한 특기로 변주될 미래의 공연도 기대된다. 배우의 호흡과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속도감 있는 장면들로 웃음을 준 점도 좋았다. 많이 보진 않았지만 간혹 너무 재미가 없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게 괜히 무게를 잡거나, 억지로 헛웃음이 나게 하는 작품들을 몇 번 만나고 나니 연극이란 장르가 원래 이렇게 정체되어 있는 것인가 의심을 하기도 했다. 임은총 연출의 이 작품도 새로운 시도로 여겨진다고 들었다. 그래서 재미있었구나! 매번 진심으로 인생과 예술에 대해 논할 수는 없고, 늘 새로운 도전을 할 필요도 없지만 가끔은 정색하면서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소리쳐 이야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누군가 그렇게 소리치고 있다면 관객으로서 동료 예술인으로서 손 아프게 박수치는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러고 싶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나도 소리칠 용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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