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dac Oct 24. 2024

업무 일지

프리랜서를 일으켜세우는 힘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드는 날에도 업무일지에 뭐라도 적는다. 휴무라고 쓰인 날도 있고, 겨우 집 밖으로 나선 날에는 산책이라고 적혀있다. 한 일은 다 적는다. 낮잠, 빨래, 청소, 장보기, 놀토 시청, 점심 약속 등. 한 화면에 한 달 정도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친구랑 점심 먹고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하고 자동차 정비소 다녀오고 책상 배치 바꾼 것 등 뭘 이런 것까지 다 적냐 할 만큼 별 게 다 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칸이 채워져 있으면 뿌듯하니까.


회사에서 쓰는 업무일지는 보통 보고용이지만, 마지막으로 다닌 회사에서는 양식을 직접 만들 수 있어서 쓰기에도 보기에도 편한 방식으로  할일 목록과 한 일 목록으로 나누어 실제로 업무 계획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썼다. 2021년부터 프리랜서의 업무관리를 위해서 업무일지를 썼다. 프로젝트별로.

2023년부터는 주간 연재를 시작해서 한 눈에 일주일에 한 일, 할 일이 다 보이는 방식으로 업무일지를 개편했다. 1년 365일 캘린더를 엑셀에 그려놓고 투두리스트를 작성하듯 일주일 동안 할 일을 대략적으로 해당 요일에 배치시킨다. 내용이 많으면 아래로 열을 추가한다. 한 일과 할 일을 구분해야 하기 때문에 계획부분은 업무일지의 아래쪽 별도 공간에 둔다. 계획대로 일을 마쳤을 때는 해당 날짜로 내용을 옮기고 하지 못했을 때는 다른 날의 계획으로 옮긴다. 선택해서 다른 칸으로 이동하기만 하면 되니 엑셀이 편하다.



일의 성격에 따라 셀의 색을 달리한다. 본업인 글쓰기에 해당하는 작업은 가장 좋아하는 색인 녹색 계열로 셀을 채웠다. 책을 위한 원고, 개인작업으로 발행하는 뉴스레터글이 이에 해당한다. 글쓰기 모임과 정기적으로 녹음하고 편집해서 발행하는 팟캐스트는 본업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것도 아니니 별도의 카테고리에 둔다. 청탁 받아서 쓰는 원고, 지원사업, 자료집 제작이나 보고서 작성 등 작가 정체성으로 의뢰 받거나 신청해서 돈을 받고 하는 하는 일은 주황색이다. 입맛이 도는 색으로 부엌이나 식탁 인테리어에 많이 쓰는 색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걸 많이 사 먹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더 재미있고 돈을 많이 줄 수록 색이 진하다. 비정기적이고 뜬금 없는 아르바이트는 주황색보다 연한 귤색이다. 부업으로 한국어를 가르쳐볼까 하고 외국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는데 딱 한 명 연락이 와서 지난 1년 동안 가끔 가서 논문 첨삭을 해줬다. 아는 동생에게 일대일로 글쓰기 수업을 하기도 했다. 이런 기타 알바가 이에 해당한다.


돈을 버는 것만이 업무는 아니니 청소를 하고 장을 보고 각종 지원사업 신청서를 쓰거나 지원서를 쓰는 일, 친구나 가족을 만나는 일 등을 적는다. 어디에 시간을 썼는지 기억하고 언제 그 업무를 했는지 기억하기 위해서 쓴다. 친구 A를 언제 만났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 정확한 날짜를 확인하면 재미있다. 생각난 김에 연락도 하고 만날 약속도 잡는다. 한눈에 들어오는 업무일지는 10회기를 선결제 해 놓은 마사지나, 8회까지 지원받기로 약속된 심리 상담등 회차를 기억해야하는 경우에도 유용하다. 한의원이나 마사지, 수영장, 스트레칭 등 건강관리와 관련된 업무는 하늘색으로 표시하는데 2월엔 단 한 칸도 없다. 운동해야 하는데.. 말뿐이다. 운동만큼 중요한 것이 마음을 돌보는 일일터, 동료 상담 비슷한 대화모임은 노란색이다. 예술인 지원사업으로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해서 이후로도 꽤 오래 상담을 받았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지기도 했고 비용이 부담되어 그만두었지만 3년 전에 시작한 ‘좋은 동료 듣기 모임’은 계속 하고 있다. 타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잘 듣고, 말하는 사람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려주거나 원하는 피드백을 주는 대화모임이다.


업무일지와 별개로 캘린더에 일정관리도 하고 있어서 약속이나 예약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지만 아무래도 나는 기록하고 기억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친구와 약속을 잡기로 하면 캘린더에 입력하고 그 주가 시작되는 일요일이나 월요일에 이번주의 일정을 확인하면서 업무일지의 계획란에 적어두고 매일의 할 일은 손글씨로 다이어리에 적는다. 하루를 정리하는 저녁이나 다음날의 업무가 시작되는 아침에 업무일지에 입력한다. 그리고 일기도 쓴다. 게으름이나 무기력때문에 그 중 한두 개를 빼먹어도 며칠 내로 보완한다. 최소한 업무일지에 메모라도 해 두면 밀린 일기를 쓰기에도 좋다. 일기가 밀릴 수록 생리통, 우울감, 컨디션 등 상태에 대한 기록이 업무일지에 늘어난다. 물론 생리주기를 앱에 따로 기록하긴 하지만 ‘시작한 날’이라는 객관적 사실과 ‘많이 아프다’는 주관적 통증과 ‘기분이 쳐진다’는 다른 종류의 콘텐츠로서 다른 매체에 담겨야 한다.


나는 직업으로 글을 쓰고 취미로도 쓴다. 글에 어울리는 그림을 직접 그리고 싶고 귀여운 노래를 직접 지어 부르고 싶어서 악기 연습과 그림 연습을 시작했는데 하다 말다 한다. 우쿨렐레를 치면서 짧은 노래를 만든 적이 있는데 언젠가 다음 곡을 만들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다. 그래서 계획란에 우쿨레레를 위한 보라색을 마련해두었다. 그림은 그나마 상황이 나아서 올해 들어서는 그림 그리는 친구의 감시와 가르침 아래 매주 그림을 그린다. 작년에는 음미체의 날을 만들어서 수영장에 가고 우쿨레레 연습을 하고 그림도 그리려는 무리한 계획을 세웠는데 올해는 연초에 계획이라고 적어는 두었으나 쓰면서도 내가 하겠냐 싶은 마음이 들긴 했다. 음악의 시간은 올해도 정녕 오지 않을 것인가. 감시와 가르침을 찾아 적극적으로 길을 나설 것 같지는 않다.


업무일지는 회사 다닐 때도 썼지만 본격적으로 전업작가 혹은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한 2021년부터는 더 중요해졌다. 기록하고 진행사항을 파악하고 다른 프로젝트를 고려해서 남은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계획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야 했다. 2021년과 2022년에는 서너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해야해서 처음에는 가로로 각 행에 프로젝트명을 입력하고 세로 열에 날짜를 적어두고 날짜별로 한 일을 적었다. 그런데 프로젝트 기간이 각기 달라 프로젝트 별로 행을 구분하는 게 큰 의미가 없어지자 한 셀에 한 개씩 한 일을 적어두었다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아 일주일을 구분하는 캘린더 형태로 바꾸고 색으로 프로젝트를 구분했다. 2023년부터는 2개 이상의 장기 프로젝트를 할 일이 없어서 바꾼 방식이 잘 맞았다. 초기에 일이 꽤 있었던 건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요즘은 일이 없어서 업무 일지에 쓸 게 없어서 방문한 식당, 카페, 해 먹은 음식을 적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