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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Oct 24. 2024

송고 계획표

두 달 안에 책 한 권 쓰게 만들어 주는 표

첫 책은 2015년에 나왔다. 2014년 연말부터 2015년 연초까지 두 달 동안 발리에 다녀왔는데,  시들기 직전에 다녀온 여행이 정말이지 좋아서 내가 묵었던 숙소, 다녔던 식당과 좋아했던 장소, 나를 위해 알아보던 여행 정보를 정리해서 작은 여행 가이드북 ‘편파적인 여행책’을 쓰는 중이었다. 시작부터 이 여행은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은 특별한 프로젝트였기에 제대로 된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현지인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들처럼 500원 짜리 주식을 길에서 사 먹은 이야기며, 최소 경비로 지내는 노하우 같은 걸 나누고도 싶었다. 여행 중에 쓴 일기와 메모를 바탕으로 돌아온 뒤에 바로 원고를 썼고, 편집과 디자인에 어려움을 느낄 즈음 출판사의 연락을 받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전자책으로 출간되었다.


여행의 기운이 가시기 전에 홀린 듯 정리했던 완성된 원고가 이미 있었고, 첫 책을 내는 작가의 의욕 덕분인지 새로 쓰는 수준인데도 석 달 안에 보완하자는 계약서보다 한 달이나 빨리 원고를 마감했다. 그때는 백수라 달리 하는 일도 없었고, 내 책을 낸다는 게 마냥 신기하고 좋아서 얼른 쓰고 싶었다.


초고를 넘긴 후에는 편집자가 검토 의견을 주고, 저자는 편집 방향에 맞게 수정하고 보완한다. 그 다음 편집자가 1교나 2교를 마치고 나서 저자가 저자 교정을 본다. 이후 최종교를 확인하고 저자 소개글과 표지를 확정하면 완료! 5월에 원고를 넘겨 9월에 책이 나왔으니 3~4개월 정도 걸렸다. 이 원고의 가제는 ‘바구스 발리’였고 <나 혼자 발리 : 적게 쓰고 오래 노는 여행의 기술>로 출간되었다.


두 번째 책인 <안 부르고 혼자 고침>은 아이템을 제안받아 쓰기 시작했다. 첫 책을 낸 뒤로도 (심지어 두 번째 책을 낸 뒤로도),  나는 스스로를 ‘작가님’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쩌다 책을 낸 사람일 뿐, 여전히 회사원이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여성을 위한 생활 기술 워크숍’을 열었고, 대성황을 이뤘다. 신문 기사를 보고 편집자가 연락을 해왔고 나는 이번에야 말로 ‘진짜’ 책을 낼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내가 기획한 책이 아니더라도 ‘저자’가 될 수 있다면 하겠다고 했다.


처음 출간을 제안받고, 기획을 구체화하고, 목차를 구성하고, 샘플 원고를 써보고, 내용을 확정하기까지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다음 해 퇴사한 뒤부터 집중해서 원고를 썼다. 집수리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 자료를 조사하고 공부해서 이해한 뒤, 직접 해보면서 사진을 찍거나 그림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면서 써야했다. 신나서 여행에세이를 쓸 때랑은 다르게 속도가 영 나지 않았다. 그러다 편집자의 제안으로 2주에 한 번씩 쓴 만큼이라도 원고를 보내기로 했다. 이미 목차는 정해져 있으니 순서대로 쓰기만 하면 됐다. 당시에는 ‘송고 계획표’를 그리지는 않았고, 출판기획안의 목차 뒷부분에 마감 날짜만 적어두었다. 각 꼭지가 독립적으로 구성된 실용서라 더 유용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마감이 생기니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주일의 계획표를 세우고 하루 작업량을 가늠할 수 있었다. 목차를 먼저 세우고, 주간 업무량 즉 원고 생산량을 정하는 집필 방식이 이때 생겼다.


<귀촌하는 법> 송고계획표를 작성할 때는 1장의 원고를 샘플 원고로 확정한 뒤라서 첫번째 마감일이 2장부터다. 마감일은 본문의 내용이 얼마나 까다로운가, 조사가 많이 필요한가, 분량이 많은가에 따라 조정한다. 무조건 일주일에 두 꼭지, 이런 식으로 나누지 않는다.


다음 책부터는 편집자가 제안하기 전에 송고 계획표를 만들어 확정된 목차와 함께 보냈다. <귀촌하는 법>과 <이왕이면 집을 사기로 했습니다>는 계약하기 전부터 상당한 분량의 원고가 있었고 편집자는 그 원고를 보고 출간 여부를 확정했다. 책을 내기로 하고 편집자가 원고에 대한 의견을 주면 나는 책의 컨셉에 맞게 목차를 다시 구성한다. 목차가 확정되면 샘플 원고를 한두꼭지 써서 컨셉에 대한 이해가 동일한지 상호 확인한다. 그런 다음 목차에 맞게 일주일에 쓸 수 있는 양을 가늠해서 송고 계획을 세운다.


달력을 보며 매주 월요일에 편집자가 받아볼 수 있도록 마감일을 정한다. 명절이나 연휴가 끼었을 땐 아무리 프리랜서라도 업무량에 영향을 받으니 일정을 여유 있게 잡는다. 쓰기 쉬운 내용과 까다로운 내용, 만약을 위한 보충 일정까지 계획을 세워 편집자와 공유한다. 그다음부터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만 하면 된다. 당연히 가끔은 마감을 지키지 못하는 날도 있다. 그래도 매주의 마감과 작업량을 정해 놓으면, 몸이 아프거나 갑자기 일이 생겨 밀릴 때도 다시 원래의 마감을 따라잡기 쉽다.


<이왕이면 집을 사기로 했습니다>의 가제는 ‘집 구하기 모험’ 이었다. 목차와 송고 계획도 수정될 수 있다. 업데이트 내역 확인을 위해 작성일을 써놓는 편이다.


매주 마감하는 습관, 마감일을 넘기지 않는 성실함은 작가로서 엄청난 장점이다. 마지막으로 함께 일했던 편집자는 출판계에서 일해온 5년 동안 이렇게 알아서 송고계획을 알려주는 저자, 마감일보다 먼저 원고를 주는 저자는 처음 만나본다고 했다. 아직 경력이 짧아서 그러실 거라고 이야기하진 않았다. 칭찬은 기분 좋은 일이고 내가 성실한 건 사실이니까. 세 번째 책을 쓸 때부터 비로소 나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더이상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았고 앞으로도 다니고 싶지 않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일정관리 능력은 주간회의록, 업무일지, 사업계획서와 결과보고서를 숱하게 써온 회사원 시절이 있었기에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원래도 계획형인간이기는 했다.)  언젠가 밥벌이를 위해 또 회사에 다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회사’도’ 다니는 작가라고 스스로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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