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을 떠날지 모르는 낭만을 위하여
기계식 시계와 수동 변속기
거의 10년 전에 읽은 책을 다시 폈다
오랫동안 시계를 취재한 정희경 님이
2011년에 출판한 <시계 이야기>라는 책,
거기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꼭 시계가 아니더라도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들이 흔해진 가운데
기계식 시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뭔가 색다른 매력이 있어야만 한다
이 글이 쓰였던 시기에는
스마트폰이나
전자식 시계 정도를 염두에 둔 문구였겠지만
지금은 건강관리, 날씨 확인 등
시계의 기능을 넘어선 스마트 워치까지 등장했고
특히 애플 워치는
스위스제 기계식 시계 산업 전반을 긴장시키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일부 기계식 시계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구매하는 것이 아닌
사치품 또는 기호의 영역으로 다가가고 있다
수동변속기 역시
적어도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기계식 시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
자동변속기가 훨씬 더 실용적이기 때문이다
수동변속기는
가격이 약간 저렴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측면에서 자동변속기에 뒤진다
일상생활에서는
자동변속기가 수동변속기보다
연비도 더 좋고, 운전하기 쉽고 편하다
영점 몇 초를 단축시키고자 하는
스포츠카, 레이싱 분야에서도
전문 드라이버의 수동변속기 자동차보다
최첨단 기계의 자동변속기 자동차가 더 빠른 시대다
나는 지난 2년 간 벨로스터 N을 타보며
'그럼에도 왜 수동변속기는
여전히 살아남아야 하는지'
수동변속기만의 색다른 매력을 찾고자 했다
아래는 그에 관한 이야기다
2년간 직접 찾아본 수동변속기의 매력 3가지
1. 지금에 집중하다
'과거'는 지나온 시간 속에 조작된다
'미래'는 다가올 기대 속에 머무른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지금'이라는 순간만을 살아가는 존재다
수동변속기는
제 때의 타이밍에 변속해야 한다
수동변속기의 운전자는
'지금'이라는 그 순간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걸 달라지게 한다
매일 달리는 도로도
수동변속기로 달리는 순간은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쓸데없는 것들로부터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2. 인생과 친해지다
수동 변속기라고 해서
사실 뭐 대단한 재미는 없다
'수동 운전도 할 줄 안다' 정도의
그런 소소한 재미
하지만
별 것 아닐 것 같은 일도
생각만 하는 것과
일단 직접 해보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일단 해보고 나니
나를 좀 더 알게 된다
내 인생과 조금 더 친해진다
그런 작은 경험들이 모여
인생의 이야깃거리를 채워가고
그동안 걸어보지 못한 길로
나를 이끌어준다
<브런치 Brunch>라는 공간에
수동 변속기에 관한
이런 글도 써볼 수 있었던 것처럼
3. 낭만을 잡아두다
자동차 잡지를 읽는 게 취미다
때문에 자동차 잡지가 발행되는 매달 말 즈음이
한 달 중 가장 기다려지는 때다
(보통 25일에서 30일에 발행)
나에게 자동차 잡지는
자동차 사진가분들의 작품이 담긴 미술관이며
자동차 작가분들의 글이 담긴 도서관이다
그리고 아날로그가 주는 낭만이다
많은 것이 디지털로 변해버린 지금
수동 변속기 역시
아날로그가 주는 낭만이 있다
'촤악촤악', '철컥철컥'
기계의 도움이 아닌
내 손으로 직접 기어를 맞물릴 때는
혼자 쾌감에 젖기도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낭만'이라는 감정은
그 대상에 끝이 있어서가 아닐까?
눈부셨던 젊음이 주었던 낭만
찬란했던 시대가 주었던 낭만
아름다웠던 사랑이 주었던 낭만까지...
지나가는 시간 속에
그것들은 결국
우리 곁을 떠나고야 만다
아직도 자동차 잡지를 사는 건
아직도 수동 변속기를 모든 건
언젠가 나를 떠날 낭만을
조금만 더 잡아두는 것
아직 놓아주고 싶지 않다는 것
그 욕심 때문일 것이다
괜히, 그냥...
나이가 들면서
괜히, 그냥...
그렇게 별 의미 없이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든다
그래서 감사하다
의미 없이, 쓸데없이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 내 주위에 있다는 것에
수동운전도 그렇다
의미 없어도, 쓸데없어도
괜히, 그냥...
그렇게 시작해 본
내 인생의 수동운전 이야기
일단 해보고 나니
그냥 해보고 나니
인생이 한 발짝 풍요로워진다
에피소드 9 끝!
빠바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