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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 박사엄마 Jan 10. 2022

여성을 살리는 또 다른 여성에 대하여

최은영 소설 <밝은 밤>을 읽고

이 이야기는 페미니즘이다.

나는 이 소설이 내가 읽은 그 어떤 소설보다도 더 페미니즘적이라고 느꼈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페미니즘.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다정한 페미니즘이다.


이 땅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낸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 <밝은 밤>은 그런 이야기다. 

여성으로 태어나 사는 것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모진 세월 속에서 주인공 여성들을 살게 한 것은 어느 남성의 보호가 아니었다. 그들을 살게 한 것은 곁에 있는 다른 여성과의 마음의 연대. 서로를 끌어안는 깊고 깊은 사랑. 그것이었다.

증조할머니에겐 새비가, 할머니에겐 희자가, 엄마에겐 멕시코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슬픔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주인공, 지연이 외로이 서 있다. 마음으로 단단히 엮인 과거 그녀들의 이야기가 지금의 지연에게로 도착했을 때 비로소 지연은 슬픔을 털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연의 옆에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언제든 손만 뻗으면 달려올 준비를 하고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다. 




<밝은 밤>을 읽으며 엄마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맨날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해서 이제는 제발 그만 듣고 싶은 엄마의 살아온 이야기를 조금 더 다정한 눈빛으로 귀 기울여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먹고살 만한 집안의 막내딸로 자랐지만 아빠한테 시집 온 후, 이해할 수 없었던 아빠의 가족들과 아빠의 경제적 방황 속에서 힘겹게 삶을 부여잡고 두 딸을 키워낸 우리 엄마. 너희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힘겹게 딸들 공부시켜 선생 만들어 놓고 기껏 둘 다 시집보내 이제 좀 내 인생 꽃 피나 했더니 큰딸이 장애아이를 낳았다. 결국 천형처럼 다시 끌어안은 큰딸의 아이들. 

어떤 마음이었을까, 우리 엄마는. 박사까지 공부시켜 놓은 딸이, 좀 더 훨훨 높이 날기를 바랐던 딸이, 그대로 주저앉는 꼴을 두고 볼 수만은 없으셨던 걸까. 비로소 자유로워진 인생의 후반기에 자신의 인생을 사셨어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었을 텐데, 우리 엄마는 기어이 딸을 살렸다. 

나와 내 딸들을 살리시며 하루하루 굽어져 가는 우리 엄마의 허리와 늘어만 가는 주름살을 보고 있자면, 나는 엄마의 젊음을 갈아 넣으며 일하고 있구나 자괴감이 든다. 어쩌면 나의 일은 엄마의 건강과 맞바꾼 부끄러운 전리품에 불과한지 모른다. 

  

나도 늘 생각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모진 세월 살아낸 엄마를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그리고 엄마가 나에게 상처 주었던 것들을 꼬집어 기억하며 나는 내 딸에게 절대 엄마처럼 하지 않을 거라 맹세했다. 


나는 아이가 아빠를 미워하게 하지 않을 거야.
아이 앞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욕하지 않을 거야.
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들지 않을 거야. 
나는 절대로 아이에게 "너 때문에" 산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다 꼴 보기 싫고 정말 살기 싫지만 "너 때문에" 꾸역꾸역 사는 거라고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야. 
아이가 엄마의 인생에 대해 책임감과 죄의식을 갖게 하지 않을 거야. 절대!! 절대!! 


엄마는 그저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사셨을 뿐인데.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고단함의 언어들은 어린 큰딸이 빨리 어른이 되도록 했다. 그리고 10대 시절 내내 아빠의 가족들을 미워하고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인 양, 공부하게 했다. 

20대를 지나, 내 친구들의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가며 나도 <밝은 밤>의 주인공 지연처럼 엄마를 미워한 적이 있다. 나는 엄마와는 다르게 자식에게 '행복'을 부담 지우지 않고, 나 스스로 바로 서서 내 힘으로 행복해지겠다 결심하고 또 결심했었다. 


그때는 몰랐다. 결혼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은 내가, 게다가 둘째 아이는 장애가 있는 상황에서, 내가 나로 바로 서기 위해 사회에서 일을 계속하려면, 나 말고 또 다른 여성의 절대적인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엄마는 그렇게 나를 살렸고, 내 아이들을 살렸다. 

(이 이야기에서 남편은 죄가 없다. 사회 구조 상 그도 나가서 소처럼 일해 돈을 벌 수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이 사회에서 돌봄은 돈을 적게 버는 쪽(주로 아내)이 그만두고 전적으로 담당하거나 아니면 더 적은 돈을 주고 고용할 수 있는 또 다른 여성의 노동력을 사는 것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으니까. )



 

둘째 재활 일정이 바쁘지 않았던 어느 아침,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과를 유독 좋아하던 막내딸이었던 엄마. 엄마의 할머니는 엄마가 아플 때면 이불속에서 혼자 몰래 먹으라고 엄마에게만 사과를 주셨다 한다. 깜깜한 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혼자 몰래 먹었던 사과는 그렇게 꿀맛이었다는데, 사과 냄새가 온 방에 가득해 엄마의 언니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단다. 

듣고 또 들은 이야기지만 사과를 좋아하는 내 큰딸을 닮았을 어린 엄마의 얼굴을 상상하며 들으니 웃음이 난다. 어린 엄마는 몇십 년 후에 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 알고 있었을까. 


나를 살린 건 엄만데, 엄마를 살린 건 누구였을까. 

어린 손녀에게 사과를 몰래 주셨던 엄마의 할머니, 늘 막내딸을 애잔해하시던 엄마의 엄마, 어려울 때마다 항상 동생 곁을 지켜주는 엄마의 언니,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낸 엄마의 동네 친구 아줌마들, 그리고 어쩌면 착하게 잘 커준 엄마의 딸들, 그리고......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며 나는 또 다른 어느 여성에게 목숨을 빚지고 있는지 찬찬히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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