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나아지고 있을 때 먹고 싶은 맛
몸이 너무 아프면 감각이 둔해진다. 평소에 주사 바늘이 몸에 들어오는 걸 쳐다보지 못하는 성격인데 심하게 몸이 가라앉으면 주사 바늘을 찌르는 걸 보고 있어도 아무 생각이 없다. 어서 처치의 순간이 지나가고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하는 기대만 있다. 그 정도로 약해졌던 때가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는 뭐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도 고개를 젓게 된다. 입맛이 없는 게 아니라 먹고 싶은 생각 자체가 사라져 버린 느낌.
그래도 며칠 지나다 보면 조금씩 상태가 나아지기 시작한다. 우선 주사 맞는 게 다시 싫어지기 시작한다. 주사를 맞거나 링거를 꼽을 때 얼굴을 찡그리는 나를 보고 간호사 선생님은 이야기하셨다. "주사 아파요? 이제 아프다고 하는 걸 보니 많이 나으셨나 보네요" 그 정도 기력이 채워지면 슬슬 먹고 싶은 음식도 떠오르게 된다. 나는 이상하게 항상 같은 음식이 먹고 싶었다.
베X밀B 랑 야X과자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부탁을 하면 흔쾌히 들어주지 않았다. 몸에 좋은 걸 먹어야지 과자 부스러기랑 음료수를 먹으려고 하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어떡해 몸이 원하고 있는데. 과자 몇 조각을 먹으면서 두유를 마시는 게 회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의사 선생님이 뭐라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천천히 먹으라고 그랬어"라고 에둘러댔다.
그런데 꼭 어느 시기가 되면 두 가지가 먹고 싶어지는 걸까. 고소함과 들쩍지근함이 섞여있는 음료, 고소함과 짠맛이 섞인 과자. 둘 사이에 고소함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럼 내가 고소한 걸 좋아했던가? 꼭 그렇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둘 모두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주전부리였다.
두 가지는 어린이를 위한 음식이었다. 너무 자극적이거나 과하지 않고 살짝 짜고 살짝 달지만 그 맛이 전부라고 할 수 없었다. 콩과 구운 밀가루의 고소함 위에서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정도랄까. 어린아이에게 권해도 크게 위험하지 않은 맛. "엄마 사탕 먹어도 돼?" 물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이 두 가지는 허락의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까 두 음식은 모두 순했다. 매운 라면을 먹듯 싸우지 않아도 됐고 졸음을 깨기 위해 새콤한 사탕을 씹는 것과도 달랐다. 좀 더 과장하자면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그런 맛이었다.
몸이 아프거나 지칠 때 그 맛이 생각난다는 건, 내가 가장 약했던 시절에 인상적으로 먹었던 것을 내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표시인 듯하다. 순한 맛으로 몸을 채우면서 아이가 점점 성장하는 것처럼, 어른이 되어서도 지금 이걸 먹다 보면 더 나아질 거라는 무의식의 표현이지 않을까. '이봐. 여기가 바닥이었어. 지금까지 잘 버텼네. 자 이제 다시 위로 올라가야지?'라고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예전에는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건강하고 잔병치레 정도는 금방 털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혀 아프지 않은 것보다 지혜롭게 아프고 지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지혜롭게 지나기 위해서는 평소 나의 위치와 어디가 바닥인지를 알면 도움이 된다. 하지만 어느 누가 자신의 최저점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오히려 바닥은 지나가고 나서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정점을 지나면서 몸은 신호를 보낸다. 만신창이가 된 자신에게 절정의 폭풍이 지나가고 있음을, 다시 또 비바람이 불지는 모르지만 일단 큰 고비가 넘어갔음을 알려준다. 한 모금의 고소하고 달큰한 두유와 고소하고 짭짤한 한 조각의 크래커를 떠올려보라고, 그걸 먹을 정도가 되었다고. 순한 맛을 느끼면서 평온해지라고, 다 잘 될 거라고 속삭인다. 이제 바닥에서 올라갈 때가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