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필요 없는

맥주가 가장 어울리는 순간

by 더딘

몇 번씩 봤어도 계속 보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영화 쇼생크탈출이 그중 하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특히 주인공과 동료들이 일을 마치고 지붕 위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오후의 주황색 햇빛이 검게 그을린 죄수들과 장면 전체에 뿌려지고 그보다 검붉은 색의 병맥주를 사람들이 마신다. 온통 주황계열의 장면이어서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 찌든 피로와 눅눅한 노곤함이 느껴진다. 그 순간 마시는 맥주라니. 병을 입에 대고 마시는 목 넘김 만으로, 맥주를 마시고 손으로 스윽 입가를 훔치는 모습 만으로 저게 어떤 느낌의 맥주일지 상상할 수 있다.


맥주는 기분 좋은 쓸어내리는 매력이 있다. 소주가 상처 난 부위를 찰싹 때려서 더 아프게 함으로써 고통을 잊게 한다면 맥주는 상처 주변을 간지럽혀서 잠시 다른 감각으로 관심을 돌리게 한달까. 목을 넘어가는 맥주의 시원함, 탄산의 간지러움은 현실을 잊고 기분 좋게 "후아" 하고 싶은 상황에 잘 어울린다.


대학생 여름 어느 날이었다. 장마가 지나고 매미가 마음껏 울어재낄 정도로 맑고 더웠던 여름. 지루함에 발버둥 치고 있는 동기 몇몇과 학교에서 만나기로 했다. 방학을 하고 몇 주간 쉬다 보니 너무 무료했었는지 심심한데 얼굴이나 보자는 제안이었다.


피시방도 있고 카페도 있고 당구장도 있고 갈 곳은 많은데 왜 모이는 장소가 운동장 트랙 옆 벤치였는지 알 수 없다. 왜 모이는 시간도 여름 한창 더울 3시 전후였는지 모르겠다. 그늘진 스탠드에 앉아 바라본 주변은 말 그대로 심심하고 무료했다. 푸른 하늘과 뜨문뜨문 지나는 구름, 뜨거운 지열과 바람, 매미소리, 간혹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전부였다. 저절로 땀이 흐르는 이 날, 우리는 왜 모이자고 한 걸까.


먼저 온 동기와 인사를 주고받고 다른 친구를 기다리며 말이 끊기고 또 한 명이 오면 말을 건네고. 그러다가 완전체가 되었을 때 우리는 이미 충분히 지쳐있었다. 햇빛 드는 곳으로 나가고 싶지 않지만 그늘 안에 있다고 해도 충분하지 않은 순간, 무언가 하려면 평소보다 큰 의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들 어디로 갈지를 정해야 하는데도 멍하게 있었다. 그때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제안했다.


"캔맥주나 사 올까?"


저녁과 밤을 달리던 술자리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낮에 마시는 술에는 어색했던 20대 초 아이들. 대낮부터 무슨 술이야, 어디 가 있다가 저녁 되면 한 잔 하러 가자, 그냥 딴 데 가...라는 말들이 나올 줄 알았지만, 답은 일관됐다.


"시원한 걸로"


멀지 않은 거리의 슈퍼에 다녀오는 동안 맥주가 담긴 비닐과 캔의 겉에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한 사람당 한 캔씩. 캔을 쥔 손에 시원한 느낌이 전해진다. 손가락으로 레버를 당기니 치익 하는 소리가 나며 구멍이 생긴다. 자 오늘 모이느라 수고했어. 짠. 알루미늄 캔이 부딪히며 탁탁 소리를 낸다. 목울대가 울렁이고 식도가 찌르르 울린다. “크으” 감탄사 하나. 다시 한번 마시니 머리가 아파오는 듯하다. 너무 시원해서 그런 걸까. 맛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 마시게 된다. “후우” 감탄사 둘. 다른 말 없이 맥주를 마시며 텅 빈 운동장과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후에 어슬렁어슬렁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맥주를 마시며 가장 기억나는 장면이다. 되돌아보니 그때는 인생을 살면서 가장 지루하고 무료해도 괜찮았을 때였다. 수능에 매달리던 것도 아니고 군대는 언젠가 가야겠지만 아직 먼 이야기 같고 대학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맞이한 방학이었다. 별다른 걱정 없음에 비해 자유로운 시간은 너무 길었다. 그런 무료함에 한 캔의 맥주가 기분을 간지럽혔다. 그건 아마 청량함이었을 것이다.


내 생에 최고의 맥주. 그런 청량함이라면 맥주 색이 푸른 바다색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가끔 맥주 한 잔 생각이 날 때마다 머릿속에 그날이 떠오른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살짝 기분 좋게 만드는 그 청량함을 살아가며 다시 느낄 수 있을까. 나이는 성인이지만 성인이라기보다는 청춘이 어울리던 시절. 청춘의 청량함. 그리울 정도로 분명 잘 어울리는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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