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

너에게 텀블러를 허하라

by 더딘

나는 잘 끓인 국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만큼 만드는 과정도 즐기는 편이다. 손님이 오거나 크고 작은 모임으로 식사를 준비해야 할 때 미역국에 건홍합 들깻가루 바지락살 소고기 중에 무얼 넣을지, 소고기뭇국을 할 만큼 무가 맛이 들었는지, 몇 호짜리 닭을 사야 닭곰탕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고민의 과정이 힘들기보단 설렌다.


국물을 내는 음식은 빨리 만들 수가 없다. 짧은 시간 안에 국을 잘 끓이기 위해 여러 조미료를 넣을 수 있다. 그렇게 만든 국은 왠지 가볍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분명 맛있긴 한데 뭔가 서로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느낌. 재료들이 물에 충분히 풀어내지 않고 뭔가를 계속 쥐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아욱 된장국처럼 오래 끓이면 초록색이 진갈색으로 변하는 몇몇 종류를 제외하고는 국은 대체로 다음날 먹는 게 더 맛있곤 했다. 재료의 긴장이 뭉근하게 사라져야 국은 완성된다.


저녁에 완성해서 다음 날 아침에 맛보는 국은 분명 어제보다 더 맛있다. 어제는 몰랐는데 국물에 초록색이 은은하게 감돌기 시작한 미역국, 투명했던 무가 하얗게 파근파근해진 뭇국, 기름을 더 걷어내서 투명하며 뽀얀 색을 내는 곰탕, 차갑게 맛보면 감칠맛이 더 살아나는 콩나물국. 잘 된 국물을 맛보면 "크허어!" 하는 감탄이나 엄지를 척 들어 올리는 만족과는 다른 반응을 하게 된다. "으음..." 하고 낮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숙성된 김장김치를 맛보듯 국이 지금 아주 잘 익었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렇지만 맛있는 국을 먹은 날은 항상 아쉽다. 이 맛이 영원하지도 않고 내일이면 달라질 것을 안다. 그전에 조금이라도 자주 맛보고 싶어 진다. 김치냉장고에서 김치는 몇 개월을 버티는데 국은 왜 그렇지 못한 건지. 그러다가 텀블러에 커피나 따뜻한 물 대신에 국물을 담아 다니면 어떨까 싶었다. 학교 가는 아이의 물병에는 홍합 미역국을, 운전하는 아내에게는 다시마가 들어간 뭇국을, 겨울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야 하는 나는 사골국을. 추운 바람이 불 때 텀블러를 열고 따뜻한 국물을 호로록 마시면 좋지 않을까. 아내는 그 아이디어를 듣고 질색했다. 맛은 있지만 굳이 꼭 그렇게 해야 해? 하긴 든든하긴 하겠네. 커피 향 대신에 사골국 향기 올라오면 만원 지하철 안 사람들은 유쾌할까?


그래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 채 늘 국을 맛본 후에 중얼거린다.


"으음... 이 국물은 텀블러에 담아서 먹으면서 다녀도 되겠는데? "


내가 국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이고 국이 네게 전하는 최고의 순간이다. 그리고 이 맛을 꼭 만인의 텀블러에 옮겨도 되는 세상이 올 것이라 다짐한다.


세상의 모든 국을 위하여, 텀블러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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