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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정원 Mar 15. 2020

Pauze, 잠시 멈춤

강제로 주어진 휴식의 맛




         어제 오전 반차를 내고 출근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사레 들린 것처럼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부터 허리를 삐끗했다. 잠시 기다려봐도 차도가 없어 오후도 휴가를 내고 병원에 다녀왔다. 어디 큰 병이 난 도 아니고 이따금 근육이 놀라 삐끗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라 그런지 몸이 아프면 한 30년 세월을 더 산 노인처럼 겁부터 난다. 당장 이대로 허리도 못 펴고 구부정하게 살아야 되는 거 아닌가, 앞으로 뭐 해 먹고 살까, 애는 낳아 키울 수 있을까 등등.


어제가 금요일이라 며칠 더 쉴 수 있어 다행이긴 했지만 두고 온 일과 주말에 하려던 논문작업에 차질이 생기니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잠깐이라도 책상 앞에 앉아볼까 했다가, 통증도 그렇지만 괜히 몇 시간 벌려다 며칠을 더 갈 것 같아서 마음 편히 쉬기로 했다!


TV를 켜니 연예인들 일상을 소재로 하는 예능 아니면 경연 프로그램, 그도 아니면 약간은 부자연스러운 여행 프로그램이 쉴새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연예인들의 일상 엿보기에 신물이 났던 터라 올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안 보던 장르의 영화 보기'를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요 근래 관심이 갔던 영화 <마션>을 검색했다. 예전 같으면 유료결제는 뭔가 하면 안 될 것 같은(?) 죄책감에 가능하면 무료 영화를 찾았을 테지만 이제는 내 시간과 취향과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없이 결제를 했다. 2,750원의 행복이랄까.


<마션>이라는 영화는 개봉 때부터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왠지 히어로물처럼 몰입 안되는 비현실적 작품일 것 같아 일부러 피해왔었다. 그런데 화성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탐사대가 모래폭풍에 휩쓸리는 첫 장면부터 몰입감이 굉장했다..!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외국배우  데이먼이 주인공이라서였을까, 화성에서 감자 재배를 시도하는 식물학자의 모습이 감명 깊어서였을까, 아니면 한때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우주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던 과학전공생이라서였을까. '나라면 어땠을까?' 하며 각 인물들에 몰입되게 하는 이야기 전개와 우주에서의 생활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너무 좋았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다 나만의 별점은 5점 만점에 4.5점을 줬다. 오랜만에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할 만큼 훌륭한 작품이었다.






        밤이 되서는 왠지 모를 울렁거림에, 책장에 꽂혀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나의 최애 여행책을 손에 집어 들었다. <여긴 지금 새벽이야>, 여행을 동경하면서도 쉽사리 떠나지 못하던 내게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건 나 자신'이라는 걸 깨우쳐 준 책이다. 더불어, 가보고 싶고 마음에 담고 싶은 곳들로 가득 차 내 발걸음을 내딛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스물셋 저자가 필름 카메라 하나만 들고 떠났던 세계여행 이야기, 그 속엔 저자의 고민과 감동이 고스한히 담겨있어 읽을 때마다 마치 한여름밤 잠못들던 첫사랑의 설렘이 떠오른다.




터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최소 폭이 700미터인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으로 나뉘는 도시 이스탄불. 오전에는 유럽의 거리를 걷다가 저물녘이면 아시아의 언덕에서 해 지는 걸 보곤 했다. 한 나라에 두 대륙이 있고 걸어서 이편과 저편에 번갈아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경계 지은 것들이 얼마나 개념적인가 깨닫게 했다.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구분 없이 해협 건너를 오고가는 것처럼, 마음의 경계가 없다면 '이곳'과 '저곳'이 다르지 않았다.

- <여긴 지금 새벽이야>, 김신지



벌써 세네 번을 읽었지만 볼 때마다 새롭고 '어쩜 어린 나이에 저런 생각과 표현을 했을까' 놀랍기만 하다. 나이를 먹으면서 내가 변해가는 게 무섭다. 사회 초년생일 때만 해도 여럿이 다같이 잘 사는 유토피아를 꿈꿨지만 그건 정말 이상향인가 싶을 때도 많고, 요즘은 '나 빼고 다들 알아서 잘 사는데 이상만 거창하고 할 줄 아는 것은 없는 샌님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또 나는 비교적 벽이 없는 사람이라 웬만한 사람들과는 두루 잘 지내는 성격인줄 알았지만 요즘 같아선 나 외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뭐든 날을 세우고 '결이 다른 것 같다'며 선을 긋는다. 개인이 조직보다 우선시되고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는 취향사회라지만 존중보다 배척이 앞서는 것 같아 스스로도 겁이 난다.



스타트업이라 몇 안 되는 작은 조직이지만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보면 아직 어리기 때문에 업무적으로 서툴기는 해도 쉽게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벽을 만들지는 않는 듯하다. 반면 단 한 번의 미팅이나 전화 연락만으로 상대방의 역량이나 태도를 단정짓고 이러쿵저러쿵 간단평을 하고 마는 나의 옹졸함에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십년 전 내가 '아, 저런 선배는 되지 말아야지' 했던 그 모습이 나에게서 나타날 때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부끄럽고 안타깝다.



한편으론, 같이 일하는 후배이자 9년 터울이 나는 동료를 대할 때 부쩍 몇몇 선배가 떠오르곤 한다. 후배의 나이였을 때 사회생활을 시작해 뭐부터 해야할지 모르던 내게, 당신도 참 지겹고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았을 회사일이라는 걸 가르쳐주고 기다려준 선배. 타 팀에 있다 서로 엉겹결에 만났지만 이것저것 알려주며 보상은 없고 책임만 주어지는 파트장 역할을 묵묵히 하셨던 선배. 그리고 별 것 아닌 보고서에도 수고했다며 잘했다며 격려해주시던 팀장님까지.



시간이 돌고 돌아 어느덧 내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 나는 얼마나 좋은 선배가 되고 있을까. '어차피 혼자 사는 인생, 다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하며  내 몫을 회피하기에는 그동안 내가 받았던 것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마냥 마음씨 좋은 Giver는 절대 못 될 성격이지만 그저 받기만 하는 Taker도 못 견딜 팔자라 그런지 이런 부채의식 때문에라도 지금보다 조금이나마 더 나은 선배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실제론 급하면 내 일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일뿐일지라도).






        얼떨결에 찾아온 집콕 강제휴식이었지만 오랜만에 그동안 머리속을 맴돌던 감정과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어 좋았다.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만 성과를 바라보던 것에서 벗어나 눈을 멀리 두고 인생의 방향을 잘 점검하며 의미있는 종착지로 천천히 나아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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