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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바위 Oct 26. 2024

엄마표 바지락 조개탕

 ”바지락 까 놨으니 와서 들고 가라.“

엄마의 부름에 하던 일을 놓고 옆집으로 달려간다. 문을 여니 훅~ 하고 조개 특유의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두리번거리며 냄새의 근원지를 찾으니 베란다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엄마가 눈에 들어온다. 그 옆에 수북이 쌓인 조개껍데기까지.

 매년 봄이면 엄마는 수산 시장을 두루 다니면서 바지락을 사 모은다. 보통 사람들보다 통이 큰 엄마가 하는  연례행사다. 그물망 가득 담긴 바지락이 성인 남자가 두 손으로 겨우 들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엄마의 얼굴에는 만족의 빛이 흐른다. 그 정도는 되어야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겠다며 안심하는 것이다.

"먹고 싶을 때 조금씩 사 먹으면 되지, 왜 이리 한꺼번에 사서 일을 만드노?"

조금씩 사서 편하게 먹으라는 내 말에 엄마는 콧방귀를 낀다. 니가 알긴 뭘 아냐는 표정이다. 제철에 한꺼번에 사서 저장해 놓아야 넉넉하게 먹을 수 있다고, 그때그때 사 먹으려면 너무 비싸다고 한다. 나는 이런 사재기가 달가울 리 없다. 집안에 풍기는 조개 비린내며 껍질 처리 문제... 제일 반갑지 않은 건 조개껍질을 까고 난 뒤 몸살이 나서 드러눕는 엄마를 보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이번에도 허리 통증을 호소한다.  아이고, 허리야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한마디를 덧붙인다.

”작년에 깔 때는 수월했는데 올해는 와 이리 힘드노. 한 해가 다르네.“

이러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온다. 40대인 내 몸도 한해가 다른데 여든이 넘으신 엄마는 오죽하랴. 작년에도 허리 통증에 신경통까지 도져서 드러누웠으면서 그새 또 잊으신 게 분명하다. 아니, 잊은 게 아니라 바지락을 포기 못하는 것이겠지.


 베란다에 자리를 만들어 엄마 옆에 바짝 다가 앉는다. 마음 같아서는 대신 조개를 까 주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조개 까기는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껍질이 맞물린 틈 사이로 작은 칼을 집어넣어 입을 살짝 벌린 뒤, 손목을 비틀면서 칼로 조갯살을 도려내는 그 현란한 기술! 난 그저 감탄하며 구경할 뿐이다. 날렵하게 움직이는 엄마 손을 따라 한쪽에는 조개껍데기가 쌓이고, 다른 쪽에는 뽀얗고 토실한 조갯살이 소쿠리에 담긴다. 수북이 쌓인 껍데기에 비해 조갯살의 양은 형편없다. 한 다라이 가득했던 조개가 껍질을 까 놓으니 영~실속 없어 보인다. 이럴 땐 뭔가 속은 기분마저 든다. 엄마에게 괜한 고생 말고 까 놓은 조갯살을 사자고 말하려다 꾹 참는다. 말해봐야 신선도가 어쩌니 가격이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들을게 뻔하다.

 

"크기가 작은 것들은 마아 안 깔란다. 느그 가져가서 조개탕 끓이무라"

조개 까는 일이 막바지에 접어들면 엄마도 손을 탈탈 털고 일어선다. 남은 바지락은 크기가 작아서 손에 잡히지 않고 까기 힘드니 가져가서 조개탕 끓여 먹으라는 얘기다. 사실 내가 기다리는 건 바로 이때다. 엄마가 깐 조갯살은 냉동실에 넣어뒀다 미역국도 끓이고 된장찌개에 넣기도 하면서 두고두고 먹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껍질이 그대로 붙어있는 신선한 바지락이기 때문이다. 매번 엄마더러 몸 상하니 이런 일 그만하라고 하면서도 소쿠리 가득 바지락을 얻어 올 때는 언제 그랬던가 싶다. 뽀얀 국물이 우러나는 바지락탕을 맛볼 생각에 절로 입이 벌어진다.


 집에 오면 내 손은 바빠진다. 신선할 때 조개탕을 끓이려는 마음에서다. 솔로 바지락을 빡빡 문질러 껍질에 붙은 불순물을 제거하고 깨끗이 씻는다. 마늘을 으깨고, 고추와 파를 송송 썬다. 바지락 조개탕은 라면만큼 끓이기 쉽다. 끓는 물에 바지락을 넣고 마늘, 고추, 파를 추가한 뒤 소금으로 간을 하는 데 이게 전부다. 특별한 레시피도 아닌데 무엇보다 깊은 맛을 낸다.  바지락의 정수가 담겨 있는 듯 맛깔나게 우러난 흰 국물에 입을 쫙쫙 벌린 바지락을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그릇에 옮겨 담고 고명으로 초록 부추를 조금 올리면 색상의 대비로 먹음새는 더욱 좋아진다. 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손을 뻗어 사발째 국물을 들이마신다. 담백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목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그래, 이 맛이야,“


 어릴 땐 조개탕의 참 맛을 몰랐다. 정확히는 어른들이 국물을 마시면서 시원하다고 말하는 그 의미를 몰랐다.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올 때 뭔가 개운해지면서 속에 있는 응어리들이 풀리는 듯한 그 느낌을. 이제는 나도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된 걸까? 엄마가 매년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신선한 조개를  사오시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조개탕 한 그릇에 녹아있는 엄마의 인생을 본다. 엄마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들이 시원한 국물에 쓸려 내려가는 상상을 한다. 아마도 엄마는 그런 맛에 바지락 조개탕을 끓여 온 건지도 모르겠다. 봄철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시원하고 깊은 바지락탕의 맛. 신선한 재철 재료에 엄마의 정성까지 더해진 이런 음식을 또 어디서 먹을 수 있을까? 엄마표 바지락 조개탕을 오래도록 맛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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