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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바위 Sep 24. 2024

너희 할머니야?

국민학교 5학년 운동회 날. 만국기가 주렁주렁 매달린 운동장 한가운데는 그간 연습한 재주를 뽐내는 아이들 공연이 한창이고, 바깥쪽에는 학부모들과 온갖 장사꾼이 섞여 만들어 내는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그 사이 타원형 달리기 트랙에서는 ‘준비~ 땅’ 하는 총소리와 함께 학급별 달리기 시합이 진행되고 있다. 조금 있으면 우리 반이 달리기를 시작할 것이다. 


우리 반 차례가 다가오자 선생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은 출발선 앞에 가로 세로줄을 나란히 맞추어 앉는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아이들과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한다. 달리기에 영 소질이 없는 나는 이때가 제일 긴장되는 시간이다. 손발이 떨리고 심지어 이까지 달그락거리며 부딪힌다. 긴장감을 숨기려 옆에서 재잘거리는 아이들에게 귀를 기울여 보지만 마음속 불안을 잠재우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이럴 때 누가 손 좀 잡아 줬으면.


 멀리서 한 아주머니가 우리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온다. 같은 반 친구 00 엄마다. 평소 학교 출입이 잦은 그 엄마 얼굴을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알고 있다. 화사한 외모와 잘 차려입은 옷.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자기 딸에게 와서 응원의 말을 해주고 가는 뒷모습을 보니 속에서 질투가 올라온다. 저분이 우리 엄마라면 얼마나 좋을까. 연이어 몇 분이 자기 아이를 응원하러 다녀가신다. 평소 말하기 좋아하는 한 친구는 엄마들이 올 때마다 누구 엄마인지, 외모가 어떤지 등 엄마들에 대한 호기심을 늘어놓는다. 그때,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 순간 내 눈을 의심한다. 바로 우리 엄마다. 평소 이런 행동과는 거리가 먼 엄마이기에 응원하러 온 엄마를 향한 반가움보다는 얼떨떨한 기분이 앞선다. 좀 전의 그 친구가 대뜸 이렇게 말한다.

윤희야, 느그 할매가? (너희 할머니야?)”

 부끄러움이 얼굴이 물들이는 게 느껴진다. 좀 전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어디로 숨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하다. 엄마도 당황했는지 날 보며 몇 마디 얼버무리고는 재빨리 자리를 뜬다.


달리기 할 때마다 만년 꼴찌였던 난, 그날 이를 악물고 달려 1등을 한다.



 

“느그 친구가 날 보고 할매라 했제? 니는 그때 안 부끄럽드나?” 

엄마는 이후로도 종종 그날 이야기를 꺼내셨다. 40대 중반밖에 안 된 나이에 할머니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어찌 충격이 아니었을까? 어린 마음에도 엄마가 상처 입은 걸 눈치챈 나는 친구가 농담한 거라며, 다른 엄마들에게도 똑같이 할매냐고 물어봤다며 없는 말까지 지어내면서 아무 일도 아닌 척을 했다. 하지만 나 역시 상처받기는 마찬가지였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하고, 고된 농사일에 피부는 까맣게 그을린 데다, 얼굴에는 주름이 여기저기 파여 있는 우리 엄마! 내 눈에도 (할머니까지는 아니어도) 또래 엄마에 비해 나이가 많아 보이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이후 엄마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나 또한 그 편이 좋았다. 어릴 땐 엄마가 학교에 자주 찾아오고, 학교 앞에서 날 기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지만, 갈수록 친구들 엄마와 우리 엄마의 차이가 느껴져서 엄마가 안 오시는 게 마음 편했다. 그리고 동네가 아닌 다른 곳에서 엄마와 마주치면 속에서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엄마는 농사일에 억척인 분이셨다.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밭에 엎드려서 일하셨고, 집에 와서는 밤늦도록 마당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다듬으셨다. 잉여농산물이 많을 때에는 보따리를 이고 지고 시장에 팔러 가셨는데 그게 엄마로서는 소소한 돈벌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게 정말 싫었다. 시장에 팔러 가는 날, 어쩌다 엄마와 같은 차를 타면 마음이 불편했다. 그나마 마을버스를 탈 때는 대부분 동네 사람들이라 좀 나았지만, 시내버스나 지하철에선 알지 못하는 도시 사람들에게 우리 엄마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대학생 때 한 번은 짐보따리를 가득 진 엄마와 같은 지하철을 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나와 한참 떨어진 곳으로 가서 앉는 것이 아닌가. 엄마 옆으로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하다 결국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자괴감을 씹어 삼켜야 했다. 내릴 때 엄마에게 왜 내 옆으로 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엄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니가 부끄러워할까 봐 그랬지.” 엄마는 내 맘을 눈치채시고 일부로 멀리 앉으신 것이다.     


어른이 되고 부모님이 옆집으로 이사 오시고 나서도 부끄러움은 당당함으로 변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훤칠한 인물의 아빠와 비교되었던 엄마. 그런 엄마 아빠를 본 사람들의 반응도 꽤 달랐다. 아빠를 본 사람들은 ‘지금 인물이 저 정도면 젊었을 땐 정말 미남이셨겠다’고 내게 얘기하곤 했다. 그럴 땐 속에서 빈정거림이 올라왔다. 그 인물 덕에 예전에 인물값 많이 했다고, 저렇게 정정하신 건 젊어서부터 집 안팎의 노동을 모조리 엄마에게 전가시킨 결과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리는 없었다. 대신 겉으로는 근사한 아빠를 내보이는 기분에 살짝 우쭐해지며 이렇게 말했다. “울 아부지 젊었을 때 사진 보면 완전 연예인이야.”


반면 허리가 굽고 몸이 틀어질 대로 틀어진 엄마를 보면 사람들은 걱정부터 했다. 어머니 몸은 괜찮으시냐고, 어디 아프신 건 아니냐고. 그들의 걱정이 들리기 전에 그런 초라한 엄마가 우리 엄마라고 인정해야만 하는 부끄러움이 먼저 앞섰다. 다른 엄마들은 70, 80세가 되어도 허리도 꼿꼿하고, 젊어 보이는데 우리 엄마는 왜...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내가 부끄럽다. 우리 엄마의 어깨를 내려 앉히고, 허리를 꺾은 것은 알고 보면 내가 아닌가. 엄마의 주름진 얼굴은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쓴 결과이다. 지금 엄마 모습은 힘들었던 삶에 대한 치열한 저항의 표식이자, 자식을 위한 사랑과 헌신의 증거인 것이다. 이런 엄마가 자랑스러워야 하는데 왜 그게 잘 안 되는 걸까.   

  

엄마의 허리가 굽을수록 내 고개는 당당하게 들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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