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가 미치도록 먹고 싶었다. 담백하고 시원한, 식사 때마다 조금씩 곁들이면 입안이 깔끔해지는 김치. 그런 김치가 필요했다. 배추김치, 무 김치, 열무김치... 어떤 종류라도 상관없었다. 갓 담은 김치, 잘 익은 김치, 푹 쉰 김치... 어떤 숙성 단계에 있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바라는 김치의 조건은 단 하나! 제발 맵지만 않기를.
집에는 엄마가 작년 겨울에 담근 김장김치가 한가득이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김치를 보면 한숨이 팍팍 나온다. 몇 번 먹어보지도 못하고 그림의 떡이 되어버린 엄마표 김치. 배추도 아삭하고, 색깔도 먹음직스러운 데다, 시원한 굴도 가득 든 김치인데 먹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매워도 너-무 매운 탓이다.
고춧가루가 매우니 김장을 조금만 하자고 했었다. 엄마는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리셨다. 의령 고모네 태양초 고춧가루라며 처음엔 매워도 김치가 숙성되면 덜 매울 거라 하셨다. 하지만 김장을 작년 12월에 했고 지금이 9월이니 이미 쉰 김치로 변한 지 오래이건만 먹으면 여전히 속에서 불이 난다. 먹을 수도 버릴 수도 없으니 이 일을 어쩌나.
냉장고에 가득한 김치를 두고 시판 김치를 사 먹을 수도 없다. 그건 힘들게 김치를 담으신 엄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렇지만 더운 날이 계속되니 시원한 마트표 ooo 김치 생각이 간절하다. 눈 딱 감고 한 번쯤 사 먹을 수도 있으련만, 마음이 허락지 않는다.
오! 나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을 감동시켰나 보다. 어느 날 남편이 김치통을 들고 퇴근한 게 아닌가. 그것도 빠알간 김치통을 손에 들고서. 웬 김치냐 했더니 직장 상사로부터 나눔 받은 명품 김치란다. 다른 선물도 아니고 김치라니 웃음이 나왔다. 김치에도 명품이 있냐는 내 물음에 남편은 국장님 친구분이 전국 팔도를 돌며 좋은 재료들만 구해서 직접 담근 김치라 그렇다고 한다.
어쨌든 잘 되었다. 김치 필요한 집에 때마침 공짜 김치가 왔으니 말이다. 김치통을 열어보니 비닐봉지에 여러 포기씩 나누어져 깔끔하게 담겨 있다. 우리 집 김치통으로 옮겨 담으면서 손으로 한 줄기를 주-욱 찢었다. 먹기도 전에 입안에 침이 고이며 명품 김치에 대한 기대감이 상승했다. 과연 맛은 어떨까?
솔직히 엄마가 담근 김치보다 조금 맛이 떨어졌다. 하지만 하나도 맵지 않았다. 그 한 가지면 족했다. 따끈따끈한 밥에 미역국, 몇 가지 반찬을 더해 저녁상을 차렸다. 밥상 한가운데는 김치가 올라갔다. 밥을 한 숟가락씩 먹을 때마다 김치가 놓인 곳으로 저절로 젓가락이 갔다. 밍밍한 입안을 김치 맛이 사악 감돌며 깔끔하게 평정하는 듯했다.
"아, 명품 김치 덕에 밥 자알 먹었다."
자꾸 명품 김치 운운하다 보니 우리 엄마가 담근 김치 역시 명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수 농사지은 고추를 햇볕 아래 공들여 말리신 후 방앗간에 가서 빻아오셨던 엄마. 엄마표 고춧가루로 온갖 정성을 다해 담근 김치는 명품 이상의 맛이었고, 넉넉한 양 덕에 다음 해 여름까지도 김치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몇 년 전 힘들어서 고추 농사를 내려놓으신 후 엄마는 김장철마다 고춧가루 걱정부터 하셨다. 다행히 이번에 태양초 고춧가루를 구했다고 좋아했는데 예상외로 너무 매워 김치를 입에도 못 대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이제 새로운 김치도 생겼는데 엄마의 묵은 김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치찌개를 끓여도 맵고, 물에 빨아서 볶아 먹어도 매운맛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엄마의 땀과 시간과 수고가 가득한 이 김치를 모른척할 수는 없다.
엄마가 우리 집에 잠시 들렀을 때 남은 김치를 어떡하냐고 물었다. 엄마의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마아 무라“
어쩔 수 없다. 1년이 되든 2년이 되든 다 먹을 때까지 마아 묵을 수밖에. 일단 나보다 매운맛에 강한 남편에게 떠넘겨 봐야겠다. 혹시 아는가. 한 2년쯤 지나면 푹 삭아서 군침 도는 묵은지로 변할지!
*'마아 무라'는 토 달지 말고 그냥 먹으라는 경상도 사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