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지 않아도

by 글쓴이 김해윤



나를 닮은 공간



처음으로 독립된 공간을 얻었다.


모아둔 돈으로 보증금을 내고

일하며 번 돈으로 월세를 냈다.


온전히 내 힘으로 얻은 첫 번째 방이었다.


직장 근처의 작은 원룸 한 칸.

항상 혼자만의 공간을 꿈꾸던 나에게

그 방은 작지만 충분히 넉넉했다.


읽고 싶던 책, 좋아하던 소품,

밤마다 은은히 빛을 비춰주던 조명까지


내 취향으로 가득 채운 그 공간은

곧 나 자신이었다.


작은 방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던 어느 날.

퇴사를 앞두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이사를 결심했다.




계단을 오르며



짐을 정리하다 보니 작은 방에서

정말 많은 이삿짐 상자가 나왔다.


엘리베이터 없는 4층 계단을 여러 번 오르내리며

팔과 다리에 힘이 빠졌다.


마지막 박스를 내려놓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 이렇게 많은 걸 쌓아두었을까.




비움의 시작



그날 이후로

나의 공간을 예전처럼 가득 채우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를 사고 싶을 때면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건 정말 필요한 걸까?"

"자리를 차지할 만큼 가치가 있을까?"


나는 내 취향으로 가득 채웠던 공간을 좋아했다.

그때의 나에겐 그게 필요했고,

그 물건들 하나하나가 나를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채우지 않아도 그 공간은 여전히 나의 것이라는 걸.


나는 이제 비움 속에서 더 자유롭고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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