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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시 Oct 19. 2021

자격증 없는 사서가 꿈꾸는 도서관

알베르토 망겔의 <<밤의 도서관>>

알베르토 망겔은 프랑스 루아르강 남쪽에 있는 “15세기 언젠가에 헛간이었던 곳”에 자신의 도서관을 만들었다. 소장한 책이 3만 5천 권쯤 되었다니 서재가 아니라 도서관으로 부를 만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모교 도서관과 영국에서 본 복도식 도서관을 본뜬 이상적인 도서관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만든 도서관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구글에 검색했다. 


나무문과 문을 둘러싼 벽, 창문과 천장을 제외한 벽 대부분이 책장으로 가려져 있다. 집(혹은 방)은 길쭉한 복도형에 가까워 보인다. 통로 가운데에는 책상이, 문가에는 원형의 1인용 테이블이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캐나다 작가인 망겔이 프랑스에 간 이유는 오직 책 때문이었다. 자신이 꿈꾸던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나라를 넘어간 작가를 보면 나도 그런 순간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부러움이 섞인 감탄을 하게 된다. 거기엔 추억 속 도서관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하는 신기함도 포함돼 있다. 



고등학생 때 다녔던 도서관은 집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도서관에 가는 길에는 ‘장미’, ‘향수’, ‘갈대’ 같은 두 글자로 된 간판에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어두운 색의 시트지를 붙인 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그 수상하고 이상한 가게들이 성매매 업소였고 동네 일부가 한때 ‘성매매 집결지’로 불렸을 정도로 번성했던 곳이란 건 나중에 알았다. 도서관에 다녀온다고 하면 어른들은 ‘뒷길은 위험하니 돌아가라’고 에둘러 말했다. 골목을 들어갈 용기는 없었지만 가끔 길 건너편에 서서 한 번씩 그곳을 돌아보곤 했다. 친구가 붉은 등 아래에 서있는 여자들은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했다. 진짜 무서운 사람은 붉은 등 아래에 있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성매매 업소들이 전부 사라졌다는 소식도 나중에 접했다. 그 사이 집 근처에 도서관이 새로 생겨 더는 옛 도서관에 갈 일이 없었지만, 반려견을 데리고 다니던 동물병원이 옛 도서관 근처라 몇 번 그 길을 지나쳤다. 고등학생이던 내가 서있던 곳과 예전 성매매 업소 사이에는 개천이 생겼다. 복개된 채 주차장 아래로 흐르며 쓰레기 냄새를 풍기던 개천은 사람들이 다니기 좋은 산책길로 변했다. 내가 맡았던 그때의 수상한 냄새도 지하로 흐르던 물냄새였을까. 큰 강으로 이어지는 개천 주변의 산책로를 반려견과 걸으며 이제는 사라진 사람들을 생각했다. 건물을 부수고 간판을 내릴 수는 있어도 사람들까지 지울 순 없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복개된 개천이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이번엔 그들이 지하로 스며든 건지도 모른다. 



동네 도서관 자료실은 내 키보다 큰 책장이 빽빽이 들어차 창문이 있어도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고 오래된 책들과 낡은 나무 책장이 내뿜는 쿰쿰한 냄새가 났다. 책장끼리의 간격은 어찌나 좁은지, 보통 체격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깨를 펴고 다니기도 힘들어 게걸음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도서관은 새책을 계속 들여놓아야 하는 곳일 텐데, 내가 다닌 도서관은 오래된 책이 대부분이었다. 수기로 작성하던 도서 카드가 책 안쪽에 붙어 있었고, 한자와 한글이 섞인 제목의 전집도 많았다. 고인 시간들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더 이상은 효용이 없어 보이는, 한자로 가득 찬 책들일 지라도 한번 도서관에 들어가면 나오기 어렵다. 도서관은 책을 살 수는 있어도 팔 수는 없는 곳이니까. 언젠가는 도서관에 책을 보관할 장소가 없어질 텐데, 그럴 때 사서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궁금했다. 먼지 덮인 책들의 마지막 도착지는 어디일까.


망겔은 책 <<밤의 도서관>>에서 책 보관을 염두에 두지 않은 도서관 설계를 언급한다. 샌프란시스코 도서관의 서가는 책의 양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게 만들어졌고, 그 때문에 서고에 있던 수십만 권의 책이 쓰레기 매립장으로 가야 했다. 사람들이 빌리지 않은 책이 버리는 책의 기준이 되자 사서들은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대출 내역을 인증하는 도장을 책 안쪽에 찍어대는 모험을 펼친다. 마지막까지 도장을 갖지 못한 책들이 줄줄이 도서관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찢어지든 말든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실려 도시를 떠나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땅에 묻힐 책들을.


그런 상상은 나를 퍽 슬프게 만들지만, 돌아보면 나 역시 책을 꾸준하게 버려왔다. 오래전에 산 책은 낡거나 읽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은근히, 하지만 차근차근 쫓겨났다. 고장 난 전자기기를 버릴 때와는 다르게 책을 버릴 땐 죄책감이 든다. 한때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던 책을 버리는 일은 한 시절 기쁘게 알고 지낸 사람을 이유 없이 내치는 일과 비슷하다. 때에 따라 달라지는 가벼운 선호도가 이유의 전부라면 더더욱.



나는 더 이상 책을 버리지 않는다. 호주에는 한국에서처럼 매일 드나들 도서관도, 주문 다음 날 도착하는 종이책도 없다. 그림의 떡이 돼버린 종이책을 갖기 위해선 만만치 않은 택배비와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러다 보니 호기심으로 책을 충동구매하는 일이 사라졌다. 구입하기 전에 시간과 돈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지, 여러 번 읽을 책인지, 이사 다닐 때마다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책인지 고려한다. 


종이책이 필요하지 않다고 결론 내린 책은 전자책으로 사거나 빌려 읽는다. 단호한 기준 때문에 읽지 못하는 책도 많지만 책을 감당할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사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방의 크기를 두세 배쯤 넓힐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언젠가 개인 작업실이나 북카페 비슷한 것이라도 열어보고 싶다는 상상을 할 때도 있지만 그곳은 상상 속에서조차 작다.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내가 꿈꾸는 장소에는 한번 들어온 책은 절대 버리지 않겠다는 의리와 사명으로 무장한 사서가 있다. 그 사서는 아직 책장 하나도 꽉 채우지 못했지만 한정된 예산 안에서 책 한 권이라도 더 구입하려고 애쓴다. 책을 곱게 읽는 사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책에는 밑줄이 잔뜩 그어져 있다. 그는 새책 대신 손때 묻은 책을 건네주고 싶어 하고, 타인이 밑줄 그은 이야기를 건네받고 싶어 한다. 


꿈까지 작을 필요는 없다고 속상해하면서도, 방문객이 몇 명만 되어도 공간이 가득 찰 거라고 뒤집어 생각하며 즐거워하는 사서는 당신을 만날 일을 기다리고 있다. 그 사서가 꾸릴 공간은 망겔이 만든 도서관처럼 살며 마주친 도서관들의 조각 모음과 비슷할 것이다. 가는 길은 무섭고 자료실은 좁고 냄새가 났지만 모든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 가치가 있었던, 우리가 사랑하는 책이 있는 장소들의 총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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