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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시 Oct 22. 2021

네게 이름이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짐을 끄는 짐승들>>과 <<침팬지와의 대화>>


사람들은 “아프리카 말라위에 있는 수백만 명의 아이들은 식량이 없어서 고통받고 있다”는 말보다 “백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이 아이를 구해주세요"라는 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익명의 얼굴을 가진 수백만 명의 고통보다 얼굴을 마주한 한 명의 고통을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통의 총합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고통받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의 슬픔도 더 커져야 할 텐데, 어째서 눈을 마주친 한 명의 괴로움에 더 마음이 가는 걸까.



수나우나 테일러 작가가 <<짐을 끄는 짐승들>>에 인용했고 홍은전 작가가 <나는 짐승이다>라는 칼럼에 옮겨 낸 '수화를 할 줄 아는 침팬지' 이야기가 있다. 나는 홍은전 작가의 칼럼을 가장 먼저 읽고, 침팬지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짐을 끄는 짐승들>>을 읽고, 계속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 <<침팬지와의 대화>>를 읽으며 글에서 글로 연결된 다리를 서슴없이 건넜다.


영장류학자이자 동물 권익 운동가이기도 한 파우츠는 침팬지 부이에게 수어를 가르치며 침팬지의 언어능력을 연구한다. 연구가 끝나자 파우츠는 연구소를 떠나고 이후 부이는 케이지에 갇혀 지낸다. 10여 년의 시간이 지난 뒤 인간과 침팬지가 다시 만났을 때, 부이는 파우츠가 가르쳐준 수어로 그를 부른다. 사람들은 사람과 소통할 줄 아는 침팬지가 다른 동물들처럼 갇혀서 지내는 존재로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에 분개한다. 대중들의 분노 덕분에 부이는 비영리 동물보호소로 가게 되었지만,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왜 수어를 모르는 침팬지는 외롭게 감금되고, 그렇지 않은 침팬지는 대중적 항의를 불러 일으키는가. 언어는 어떻게 그런 권력을 갖게 되었나. 우리가 케이지에서 꺼내고 싶은 것은 침팬지가 아니라 언어라는 인간적 능력이 아닌가.
<<짐을 끄는 짐승들>>


우리가 이름 붙인 반려동물은 하나하나 사랑스럽지만 우리가 먹는 동물들에는 이름도 표정도 없다. 동물들은 서로 얼굴을 알아본다지만 인간의 눈에는 다 똑같은 개체들로 보인다. 수십, 수백만 마리의 돼지와 소와 닭이 열악한 환경에서 인간을 위해 태어나 인간을 위해 죽지만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



인간이 정한 인생에서 벗어난 동물 이야기는 뉴스가 된다. 목축업자들은 소에게서 최대한 많은 양의 고기를 얻어내기 위해 약을 이용해 소를 살찌우는데, 어떤 소는 도축용 기계에 들어가기에 너무 커서 살아남았다. 뉴욕에서는 소 한 마리가 도축장을 탈출해 축구 경기장을 달렸다. 이 소는 동물 보호소로 옮겨져 ‘Shankar(행복, 번영을 가져온다는 뜻)’라는 이름을 받게 된다.


인간을 위해 죽어야 하는 동물들은 도축장에 끌려갈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거나 눈에 띄는 행동을 할 때, 동정받고 삶을 보장받는다. 부이는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가졌기 때문에 보호소로 옮겨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왜 부이에게 남은 생이 감금뿐이라는 데 분노를 느꼈을까? 세상에는 부이 말고도 인간을 위해 죽고, 인간 대신 실험 대상이 되는 동물이 수없이 많은데 말이다. 인간과 비슷하게 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동물이 갇혀 있는 건 잔인한 현실이라? 그렇다면 우리와 소통할 수 없는 대부분의 동물들에게 부여된 죽음은 당연한 수순일까?



어린 왕자는 지구에서 5천 송이의 장미꽃을 만나고 슬퍼했다. 자신이 가진 장미 한 송이가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우는 그런 어린 왕자를 보고 말한다. 네가 장미와 함께 한 시간이 너의 장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고. 네가 장미를 길들였기 때문에, 너의 장미는 다른 어떤 장미와도 같지 않은 한 송이의 장미가 되었다고. 장미의 이름이 장미일뿐일지라도.


우리가 시간을 나누고 마음을 전한 이들은 이름을 가진 하나뿐인 존재가 되지만 우리 눈에 띄지 않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죽고, 죽고, 또 죽는다. 특별한 능력이나 이야기를 가져 인간의 눈에 띈 소 몇 마리, 돼지 몇 마리만이 겨우 살아남는다는 사실이 이상하다고 느낀다면, 그 많은 동물들이 한 단어로 묶인 ‘동물'이 아니라 하나하나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거기서부터 뭔가 시작되지 않을까.



만일 우리가 얼굴 없는 이들의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전에 그들이 가졌을 개별적인 얼굴을 상상해 본다면, 이름 없이 ‘소'나 ‘닭', ‘돼지'로 불리는 동물들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기기 전에 그들이 가질 수도 있었던 다른 이름과 삶을 한번 떠올려본다면, 우리의 삶은 변할 수 있고 그들의 삶도 바뀔 수 있다. 그건 그리 어려운 상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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