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어릴 때 우리 집에는 TV 한 시간 규칙이 있었다.
하루에 딱 한 시간.
그 뒤로 신기한 변화가 생겼다.
무엇을 틀어줘도 아이들이 수험생마냥 본다.
제작진의 의도, 감독의 웃음 포인트까지
분석하려는 듯.
TV 앞에서의 눈빛은 거의 재수생의 비문학 지문 독해다.
집중도만 보면 아이들은 이미 학자였다.
어느 날
나는 아이들에게 그 허락된 한 시간을 열어주려고
오랜만에 ‘둘리’를 틀었다.
나도 한숨 돌리려 아이들 옆에 앉았다.
둘리송이 나왔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음음~
알 수 없는 둘리 둘리
빙하 타고 내려와 음음~♬"
둘리는 무해한 만화인데도
생각은 나 자신에게 유해한 데로 흘러갔다.
우리 큰 아이의 질환인
투렛증후군을 설명하는 데 자주 쓰이는 그림이 떠올랐다
투렛은 ‘틱 + 동반질환’이다.
아이마다 조금씩 다른 조합으로
ADHD, 불안, 강박, 감각 과민…
무서운 단어들이 저마다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틱은 투렛이라는 빙산 중
수면 위에 살짝 드러난 한 조각일 뿐이었다.
내가 처음 이 ‘빙산 그림’을 봤을 때,
수면 위에는 작은 틱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깜깜한 단어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이 그림은 아이의 어려움이 모두 나에게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솔직히, 겁이 났다.
무엇보다도 이 한 문장은
거의 협박처럼 들렸다.
“틱은 사라져도 동반질환은 남는다.”
그 말이 현실을 설명하려는 의도였다는 걸 알면서도,
그날의 나는 그 문장을
마치 미래의 경고처럼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동안 마음이 오래, 깊게 흔들렸다.
사실 투렛만 그런 것이 아니다.
조금 다른 아이들은 대체로 그렇다.
ASD라 해도 ADHD가 따라오고,
ADHD라 해도 틱이 함께하고,
감각 문제가 옆에서 고개를 들고,
언어·학습의 어려움이 조용히 뒤따라오기도 했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나는
특수교사로 알고 있던 걸
엄마로서… 아주 처절하게, 그리고 현장감 넘치게 다시 배우고 있었다.
전공서적으로 배운 건 ‘지식’이었고,
내 아이가 보여준 건 ‘실전’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이 하나에 왜 이렇게 ‘추가 옵션’이 많은지.
주문도 안 했는데 계속 애매한 사이드 메뉴가 따라오는 느낌이었다.
둘리가 타고 온 것은
빙하(glacier)가 아니라 빙산(iceberg)이다.
빙하는 오랜 시간 땅 위에 쌓여 만들어지는 얼음덩어리고,
빙산은 그 빙하에서 떨어져 나와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조각이다.
둘리는 그 떠다니는 빙산을 타고
서울까지 멀쩡히 도착했다.
그 얼음조각은 둘리를 가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는 이동 수단이었던 거다.
그곳에서 도우너 또치 같은 따뜻한 친구도 생기도,
희동이 같은 귀여운 동생도 얻고,
고길동 같은 잔소리+돌봄형 어른도 만났다.
둘리 인생은
빙산 때문에 망한 게 아니라,
오히려 빙산 때문에 시작됐다.
그래.나도 마음 속에서 투렛 빙산 그림을
조금은 다르게 봐야지라고 생각했다.
빙산 아래엔 많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조금 다른 아이들 각자는 ‘아래’를 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들의 인생 전체를 설명해주는 건 아니다.
큰 아이 역시
빙산 아래에 동반질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종이접기와 레고를 향한 끝없는 열정,
‘동생맨·오빠맨’ 노래를 부르며 놀던 남매의 우정,
그리고 그 아이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엉뚱한 귀여움,
가령 조금 전 진지하게 말하던
“엄마, 나 똥이 메롱메롱했어” 같은 순간들.
또 있었다.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손끝만 또렷해지던 아이.
무언가 만드는 일에 몰두할 때면
작은 부품 하나에도 숨을 고르며
뚝딱뚝딱 집중하던 표정도 있었다.
동반질환 아래에
이렇게 조용하고 단단한 힘들이
분명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 곁에는
엄마아빠의 사랑이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다.
말로 다 설명하지 못했던 마음,
아이가 흔들릴 때마다 붙잡아주려던 손길,
매일같이 다시 시작하던 인내가
늘 아이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아이를 둘러싼 이들의
따뜻한 시선도 있었다.
학교 선생님,
학원 선생님,
교회 어른들,
엄마 친구 이모들,
놀이터 친구들,
학원 형⋅누나들,
그리고 "그 놈 참 잘생겼다" 말을 건네주던 동네 할머니까지—
그런 작은 마음들이
아이의 하루를 한 뼘씩 지탱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아이의 빙산을 채우고 있던 건
동반질환뿐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 온 사랑과 일상의 온기였다.
그 덕분에,
우리 큰 아이도 언젠가는
자기 사람들을 만나며
자기 세계를 넓혀갈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일상의 평범함을 위해 엉덩이를 들 차례다.
아이들은 둘리에 배꼽을 잡고 있고
정해진 한 시간은 어느새 흘러가고,
나는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
아이들의 밥을 차려야 한다.
이 집의 ‘다정한 부엌떼기 타임’은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빙산이든 빙하든,
때가 되면
엄마에게 필요한 건
결국 밥솥 스위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