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2017년 가을, 나는 캐나다 스타벅스에서 워홀 생활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 받은 시프트(일하는 시간)는 주 2~3회, 4~6시간이었다. 그렇게 한 두달 일했을까. 유학 생활, 워홀, 이민자 등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국적의 뉴비들이 등장했다. 멕시코, 콜롬비아, 중국, 프랑스 등 살면서 이렇게 다양한 국적의 동료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조금 친해진 19살 멕시칸 캐내디언 D가 물었다. "너 일 안해도 돼? 왜 시프트 더 늘려달라고 말을 안 해?" 훅 들어온 질문에 당황했고, 외국인 노동자로서 쭈뼛쭈뼛 변명 늘어놓기를 시전했다.
"그야... 내가 거의 막내로 들어왔으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서서히 늘려주겠지! 넌 몇 년 됐고 (궁시렁 생략)"
D는 단호하게 답했다. "아냐. 풀 타임 필요하면 가서 말해. 얼마 전 들어온 중국계 캐내디언 N도 너랑 비슷하게 들어왔잖지만 어쨌든 너가 더 빨리 들어왔잖아. 넌 시프트를 더 받아도 돼. 불공평한 스케쥴이야!"
에? 내가 불공평을 겪고 있다고?
'막내가 된지 한 두달차라면 이런 시프트를 받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난 바리스타도 처음. 해외도 처음. 영어도 서투른 아시안이라고요!!!!!' 속으로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D의 말이 맞았다. 돈이 필요했다. 근데 시프트를 계속 이렇게 유지하면? 여행은 무슨. 일상이 팍팍해진다. 마침 밴쿠버에 와있는 학교 선배에게 다른 알바 자리를 추가로 소개 받을까 하던 참이었다. 결국 나는 D의 말에 작은 용기를 얻어 어필에 성공했고 이후 안정적인 시프트를 받아 1년 생활비를 스타벅스 알바 하나로 감당했다. 작은 키에 어딘가 단단한 맷집이 있던 맥시코계 캐내디언 D는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나에게 처음 알려준 친구다. "Hey, Honey. Do it!" 이후로 나는 캐나다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알뜰살뜰 챙기는 문화를 많이 목격했다. 쉬는 시간 매장 근처에도 못 있게 했다. 쉬는 시간마다 매장 근처에 있는 바다로 당장 달려가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라는 둥.. 그러면서도 음료를 시킬 땐 미친듯이 커스텀 해먹는 캐내디언들이라니.. 뭐랄까. 고객으로서,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미친듯이 챙겨버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갑질 노동에 익숙한 풋내기 20대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02.
해외에 살며 '약자'가 된 적은 단 한 번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했는지 가늠이 안되는 '어려 보이는' 20대 아시안 여자에겐 별별일이 다 생긴다. '신경 안 쓰면 그만이지 뭐.'하고 애써 무시해도 언어가 서투른데다 면전에 그 어떤 디테일한 욕바가지를 할 자신이 없던 난 '하고 싶은 말'을 꾸역꾸역 삼키며 모자란 언어 탓부터 했다.
한 번은 40대 헬기 조종사가 와서 내 나이를 알고도 헬기 데이트를 신청하며 추파를 던졌을 때 속으로 '별 미친놈이 다있어'하며 웃으며 넘겼다. 자주 오는 단골 아저씨는 알고보니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부자였는데 스타벅스에서 캐셔하지 말고 차라리 캐나다에서 유학을 하며 미래를 잘 설계하라 훈수를 뒀다. (외국까지 와서 알바만 하고 가는 젊은이가 안타까워 그러셨겠지만) 사회적 지위에 대해 무언의 압박감을 계속 주며 계속 이야기를 했을 때 '다 계획이 있으니 걱정마시라'고 잘라내지도 못했다. 한국에 다시 돌아가 내가 원하는 잡을 가질것이며, 그저 고민중이라고 대충 둘러댔다. 마지막으로 필리핀계 캐내디언 아줌마는 올 때마다 '한국-일본'의 관계를 들먹이며 너네 일본 꺼잖아 어쩌고 저쩌고 미친 막말을 해대며.. 올 때마다 정신나간 소리를 해서 동갑내기였던 스타벅스 매니저가 "저 미친 여자 또 온다. 내가 막아줄게." 나 대신 영어로 쉴드를 쳐주던 R에 대한 기억도 있다. 캐나다 생활은 전체적으로 200% 아름답고 행복했다. 하지만 떠올려보니 약자가 되던 순간들이 선명히 존재했다. 비단 아시안만 그런 것은 아닐거다. 그러고보면 무의식적으로 권력을 지닌 이들은 언어를 예민하게 고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맞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어른에 한해서)
03.
갑자기 '약자'란 키워드를 길어올린 것은 은유 작가님의 『다가오는 말들』이란 책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쉽게 열어보지 않을 책인데.. 숙제라 끝까지 다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부모 가정의 자녀, 친족 성폭력 피해자. 군 의문사로 아들을 잃은 부모,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학교 밖 청소년, 다른 직업을 찾는 성매매 종사자 등 귀기울이지 않으면 남의 이야기로 치부되는 약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런 무거운 주제는 언론을 통해 스치거나, 언론이 차마 다 들추지 못한. 아니 '굳이 들추지 않는' 이야기를 '유튜브'로 가볍게 꺼내줘야 그나마 눈길이 간다. 그러다 꼭 끝에는 '에잇! 더러운 세상. 결국 핍박받는 건 피라미드 사회 제일 끝단에 있는 시민이잖아.'하고 계급사회의 존재를 더욱 인식하게 만들었다. 한 개인이 어떻게 책임지고 해결해줄 수 없는 복잡한 사회적 문제를 맞닦뜨리면 마음이 답답해지곤 했다.
04.
얼마 전 남자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평온하게 매일 덮는 이불 또한 누군가 자신을 희생한 댓가로 만들어진다'
매일 마시는 커피 한 잔도, 입사를 앞두고 했던 쇼핑도, 셀 수 없을 만큼 먹어댄 계란후라이도. 인간이 무언가를 '편안'하게 '많이' 향유하고 있다면. 게다가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다고 여겨질 때면? 그 뒤엔 내가 알지 못하는 '비윤리적인 생산 및 유통 방식'이 버젓이 존재했다.
'비건강한 패스트푸드'도 그저 트렌드로 볼 수만은 없다. 유부잣집 아이는 유기농 식단을. 가난한 아이는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한 끼를 떼우는 것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네 현실이었다. '원래 세상 구조가 그래'라고 하기엔... 결국 그런 상품을, 그런 사회와 시스템을 만들어온 '어른들'에게 책임이 있다. 책을 어렵게 정독하며 내가 아는 세상은 0.000001%에 지나지 않음을 또다시 깨달았고 좌절했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쉽사리 내놓지 못해 책을 자꾸 만지작 거렸다. 작은 변화라도 만드는 소시민이 될지 아닐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당장 결정해야할 것 같은 압박감에 휩싸인 것이다.
05.
누구나 한 번쯤 '약자'가 된다. 과연 한 번일까? 하나둘 세다보면 수 백번은 될 거다. 상사 앞에서 괜히 쪼그라들 때도. 어두운 길을 지나며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할 때도. 큰 대출 앞에서 심사를 받기 위해 호흡을 여러 번 가다듬을 때도. 우리는 그 어떤 식으로든 '약자'가 된다. 다만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갈 때도 많다. 부정하고 싶지만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약자' 포지션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다. 어떤 것은 유난이라고 느낄 때가 있고, 어떤 것은 끄덕이며 깨달아질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혼란스러웠던 것은 그렇게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 안에서 자리 잡은 것들이 있고, 모두가 동등한 권력과 위치에서 말하기를 하기는 어려울 거란 사실이 나를 지배했다. 사실 '외노자'의 경험을 가져온 이유는 내가 비교적 쉽고 가볍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죽을똥살똥 외노자의 경험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폭력'의 문제와 맞닿아있는 중요한 사안이다.
06.
p10. 모르니까 무심해지고 무심하게 무례해지고, 남의 불행에 둔감해지면서 자신의 아픔에도 무감각한 사람이 되는 악순환에 말려들어간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애만 아니면 됐지. 내 애만 그렇게 안 키우면 됐지."라고 생각하고 사회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 부모처럼.. 나 역시 "나만 아니면 됐지. 나만 그렇게 생각 안하면 되지." 그렇게 잠시 분노하다 내 일상으로 스위치를 전환하며 회피했다. 슬프고, 잔인하고, 냉혹한 전쟁은 영화 속에나 있지. 현실에서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내 작은 회피는 '회피하는 어른이 사는 마을'을 만들고 있었다.
07.
그러다 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엄마'의 이야기에 꽂혔다.
60대가 되어도 엄마의 노동을 은근 당연하게 생각하는 딸,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서로 얽혀있는 것이 차라리 행복하다며 모호한 독립성을 고수하는 딸, 첫째 딸로서 애매하게 책임지고 있는 사안들. '다들 그렇게 살아'라는 말로 '가족간 사랑'이라는 예쁜 말로 잔뜩 포장하며 '책임'을 과도하게 씌우는 것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애매모호하게 서로를 '약자'로 만들었던 시간들을 아래 글을 통해 돌아봤다.
p22. 담임과의 상담은 아이를 아는 시간이 아니라, 아이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나를 아는 자리였다.
p22-23. 그날 밤 아이에게 학교에 다녀온 얘기를 했다. 대개 아이들이 그렇듯 겉으로 태연했다. 남자애들이 놀린 건 사실이지만 사과했고 다 끝난 일이라며 말꼬리를 잘랐다. 왜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는지 물었더니 "엄마는 무조건 걱정만 하잖아"한다. 엄마한테 말해봣자 문제 해결에 도움은 안 되고 '엄마의 걱정'을 해소해줘야 하는 문제까지 추가되는 구조를 아이는 파악하고 있었다.
p60. (좋은 엄마가 아닌) 엄마가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만 연구되고, 자식이 엄마에게 미치는 영향은 왜 연구되지 않는거죠? 영화를 보고 엄마에게도 자아가 있음을 알게 됐다는 딸의 문제 제기였다.
p65. (생략) 여자의 몸에서 임신과 출산이 이뤄지는 한 양육에 따른 최종 책임은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여자에게 귀속되더라는 것이다. 여자의 몸이 무거워지는 순간 필연적으로 삶도 무거워진다.
p101. 엄마의 노동은 일흔 넘어서도 계속된다.
"농땡이가 최고야. 젊어서 일 많이 하지 마시오. 늙어서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그렇게 열심히 안 했어. 젊었을 때는 뼈가 나긋나긋하니까 물 불 안가렸지. 농땡이가 최고야."(박미경, 『섬』, 봄날의 책, 2016) 짐승처럼 일하다가 벌레처럼 작아진 몸피에서 나온 사리같은 말, 인간다움을 추구하기에 너무도 혁명적인 그 입말을 곱씹는다.
p105-106. 엄마가 돌아가신 지 10년, 엄마 김치를 못 먹게 된지 10년이다. 김치 가뭄으로 엄마의 부재를 실감한다.(생략) 가사노동, 양육노동, 집필노동으로 꽉 채워진 일상. 내 인생에 김치노동까지 추가되면 끝장이라는 비장함으로 안 배우고 버텨왔다. (생략) 식구들이 잘 먹으면 먹이고 싶으니까. 내가 나를 말리는 심정으로 김치 먹을 자유보다 일하지 않은 권리를 수호하고 있다.
"고춧가루 빚깔이 안 좋아서 속상해.""올해는 절임배추 써볼까 싶어." 요즘 시장에서, 거리에서, 버스에서, 목욕탕에서 나이 든 여자들은 둘만 모였다 하면 김장 얘기다. 마음에 김치가 사는 나는 이런 목소리를 줍고 다닌다. 머리가 하옇고 허리가 기역자로 굽어도 장바구니 달린 보행기를 밀고 다니면서 쪽파며 배추를 실어 나르는 동네 할머니를 본다.
08.
"피와 살로 스며 똥으로 나가버리는 엄마의 땀." 작가는 어머니가 해주신 밥과 김치 먹고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 가시화되지 않는 '어머니의 노동'에 대해 콕 짚어준다. 저돌적인 표현으로 딸의 마음을 후벼팠다.
여든 살을 맞아서야 김장을 안 하겠다고 선언하며 '늦은 은퇴'를 외치는 할머니 이야기가 퍽 와닿았다. 얼마 전 요양병원에서 마주한 친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나서야 군 의문사이야기가 귀에 더 들어오고.. 열악한 상황에서 20대 남성이 노동을 하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던 뉴스를 보며 마음이 무너지는 엄마의 마음이 적혀있다. '엄마가 되면 강해져'라는 말이 무색하게 엄마는 자식 뒤에서 남몰래 몇 만번을 울고나서야 덤덤해졌다. 엄마의 삶을 떠올리니 약자의 마음에 완전히 몰입되었다. 억울함과 미안함이 화수분처럼 동시에 터져나왔다. 전반적으로 여성, 엄마가 왜 '약자'로서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 반박이 불가할 정도로.. 사례가 무궁무진하다. 엄마와 투닥거리는 나의 일상을 떠올리며 여전히 나는 불효녀가 맞구나. 무심하게 끄덕였다가 뭉클해졌다가 엄마에게 잘하기로 또 다짐한다. 그러다가 첫째로 살아온 나에게는 어떤 프레임이 있는지. 나 스스로를 '약자' 포지션에 두지 않고 할 말은 하고 살기로 한다.
09.
'엄마'로서 미친듯이 고뇌하는 작가님을 보며 우리 엄마가 잔뜩 메모해두는 수첩 생각이 났다. 어느 날은 6070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고민이 적혀 있었고, 또 어느 날은 건강한 레시피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적혀 있었다.
자식 몰래 엄마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잘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식 셋 밥을 건강하게 차려주기 위해 노동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김치찌개가 좋을지, 된장찌개가 좋을지. 내일 장조림을 먹고 싶은지 아닌지. 매일 집밥만 먹는 것도 아닌데 아침에도 밤에도 다음 날 식단을 묻는다. 코흘리개 5살도, 철부지 16살도, 공부 스트레스를 받는 19살도 아닌데.. 엄마에겐 여전히 '챙겨야 하는 자식'인 것이다. 사랑이자 노동이다. "그냥 엄마들은 다 그래"라고 하기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엄마의 일상. 엄마에게 노동을 내려놓으라고 늘 말하지만, 그래도 하겠다면 고마움을 언어로 행동으로 적극 표현해야 한다.
10.
p209.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에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사무치는 나날이다. 일터 괴롭힘이든 아동학대든 학교 왕따든 성폭력이든 다수의 침묵과 방조 없인 불가능하단 얘기다. 살면서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정신차리고 피해자가 됐을 때 대응하자며 공부하지만 시급한 건 목격자로서 행동 매뉴얼, 남의 일에 간섭하고 목소리를 내는 훈련같다.
꼭 '아이'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 사람이 스스로의 인생을 살다가는 일은 한 사회가 갖는 역사, 문화, 시스템을 공유하는 일이다. 그 사회가 허용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 자연스럽게 약자가 만들어진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더욱 '경청'해야 할 이유다.
솔직히 나는 책 내용을 100% 같은 관점으로 보진 않는다. 다른 관점으로 재해석할 여지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나에게 '앞으로 어떤 마을을 만들고 싶은 어른인가?'란 질문을 남겼다. 될 수만 있다면 '경청하는 마을'의 시민1 정도 되고 싶다. 밴쿠버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내게 당돌히 알려준 D처럼 나이와 경험에 상관없이 세심하게 주변의 삶에 귀기울이고 주저없이 'why'를 물어봐줄 수 있는 어른이면 좋겠다. 귀 닫지 않는 어른.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