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러너들
결승점 없는 마라톤이라니!
커피를 애정하는 달씨가 오후에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금요일 밤이었다. 뒤척이던 그녀는 뭔가 떠올린 듯 불쑥 컴퓨터를 켰다. 달리기 세계에 발을 살짝 들여놓으면서 최근 달리기에 호기심 많아진 달씨, 며칠 전 그녀가 본 호주 기사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결승점이 없는 울트라 마라톤'이라는 것을 보았다. 한 바퀴 6.7Km 원을 지칠 때까지 달리는 것이다. 우승자는 4일 동안 102바퀴를 돌아 총 600Km 이상을 달렸다. 그의 인터뷰에서 그의 달리기 기본기는 '파크런'에서 시작되었다 했다.
마라톤 42.195Km라는 거리도 감이 전혀 안 올뿐더러 사람인가 싶어 하는 달씨는, 사람이 거의 4일간 최소한의 잠만 자며 600Km를 달렸다고? 이게 무슨 얘기인가 싶었다. 충격적이었다. 그렇다면 그 러너가 말한 '파크런'이란 무엇인가 궁금해서 벌떡 일어났다. 요즘의 달씨의 관심사는 온통 달리는 사람들인가 보다.
파크런이 뭣이여?
달씨는 파크런의 실체를 알게 된 순간, 마치 잊었던 현금을 주머니에서 발견한 듯 웃음이 났다.
파크런 (Park Run)은 2004년 영국에서 13명이 시작한 무료 러닝 이벤트.
지금은 22개국, 3백만 명이 참여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아침 8시, 정해진 공원에서 5Km를 달린다 한다.
바코드 등록을 통해 개인 기록까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달씨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미니 대회를 무료로 해 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달씨의 눈과 손이 바빠졌다. 이벤트는 다음 날 아침 8시, 그녀가 정보를 찾았을 때는 이미 자정. 준비 없이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늦은 밤 무턱대고 또 신청을 해버렸다. 그녀는 달리기 대회라는 것은 풍문으로 들었을 뿐 본적도 간 적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작은 동네 달리기 대회 근처에도 가보지 않고 덥석 마라톤 하프코스를 신청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무턱대고 신청하기'가 달씨 주특기?
미리 대회 분위기도 경험하고 혼자만 연습하다 다른 사람들과 달려보는 것은 어떨지 몹시 궁금하여 급히 등록을 하니 잠시 후 정말 바코드가 왔다.
첫 파크런 참가
다음 날 아침, 날씨가 착하지만은 않았다. 춥고 비도 온다는 예보였다. 다른 러너들과 달리기는 처음이라 은근히 복장도 신경 쓰이는 달씨. 모자를 써야 할지 선글라스를 쓸지, 폰은 들고 가야 할지 이어폰을 껴야 할지, 반바지를 입어야 할지 긴바지를 입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오는 달리기 초보. 이것저것 바꾸고 결정을 반복하다 침대에서 1시간을 보냈다. 침대에서 출발선까지의 거리, 그게 진짜 마라톤의 시작이라나? 누군가 무심코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았다며 달씨는 서둘러 허겁지겁 출발했다.
길 위의 러너들
장소는 자주 가는 공원인데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다. 멀리 주차를 하고 헐레벌떡 도착한 출발선에서 달씨의 눈은 놀라서 휘둥그레졌다. "나만 몰랐다!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이렇게 많은 러너들이 공원을 달리고 있었다니!" 수백 명이 되어 보이는 사람들은 출발선에 모였다. 오메 이런 분위기구나! 왠지 모를 기분 좋음과 긴장감, 신기함이 출발선 근처에 뒤섞였는데 도착하자마자 출발 소리에 맞춰 허둥지둥 출발해야 했다.
러너들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반려견들도 함께 달릴 수 있어서 각종 개들도 만나면 서로 짖고 냄새 맡으며 달린다. 그리고 또 러너들은 어른 사람들만이 아니었던 것도 달씨를 놀라게 했다. 10살도 안된 어린 러너들도 부모님과 함께 달리고, 유모차에 앉아있거나 잠을 자는 아기들도 러너들이다. 유모차 부대, 개들 동반주자들, 유치원 아이부터 꼬부랑 할머니까지 모두 함께 Go!!
공원 길은 아스팔트 도로 보다 흙과 잔디길이 더 많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 물웅덩이도 만들어져 신발이 젖기도 하고 먼지로 더러워졌다. 달씨는 계속해서 뒤쳐졌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그녀를 앞질러갔고, 대부분 러너들은 짝이나 그룹으로 달리며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여유롭게 달렸다. 그들 중 몇 명은 등에 50, 100. 200이라는 숫자가 쓰여있었는데 그것은 파크런 참가 횟수 기념 티셔츠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500도 있었다. 속도가 아닌 꾸준함이 보였다. 상상할 수 없는 그 꾸준함의 등들을 보며 앞을 향해 달려갔다.
길고 먼 5Km
달씨가 아직 2Km 정도 달렸을 때 선두 선수들은 이미 결승선에 가까이 다다름을 보고, 하프 마라톤을 미리 겪는 듯했다. 예상은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정신줄을 똑바로 잡고 있어야 한다고 혼자 웅얼거렸다. 이제 반 왔다고 알려주는 2.5Km 지점에서의 반환표시가 어찌나 기뻤던지. 그날 그녀는 느린 러너인 것이 확실히 증명되었다.
그래도 그녀가 웃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추운 날 아침 나온 꼬마 자원봉사자들이 주는 미소와 하이파이, 모든 참여자들을 사진 찍어주고, 코너마다 힘내라고 서서 격려해 주고, 잘 달린다며 칭찬해 주는 자원봉사자들의 에너지 때문이었다.
시작은 어떻게 하는지 난감했던 것처럼 끝 또한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역시나 자원봉사자들의 격한 환영을 받으며 5Km 결승선을 꾸역꾸역 통과했다. 그녀가 자주 갔던 공원이지만 이렇게 큰 공원으로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느렸다, 그러나
스텝 한 명이 그녀의 손에 작은 카드를 쥐어줬다. 이후 바로 잡에 가는 것인지, 아니면 뭘 기다려야 하는지 몰라 순간 뻘쭘함을 느낀 달씨는 주변을 보았다. 이미 달리기를 마친 사람들은 결승선 주변에서 듬성듬성 모여있었다. 자원봉사자에게 오늘 처음이라고 얘기하니 바코드를 보여달라고 한다. 자원봉사자는 바코드를 타임 기록 기계에 찍고, 주었던 카드는 회수했다.
달씨의 동네 첫 대회의 5Km는 그렇게 끝났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이메일을 보니 그날 아침 파크런의 결과가 도착했다. 대단히 현실적인 숫자들의 나열이었다. 참가자 252명 중 순위, 여자 참가자들 중 순위, 나이 그룹 중 몇 등. 놀라울 것도 없이 끝자락이었지만, 달리기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사실이 더 즐거웠다. 그리고 혼자만의 달리기에서 함께 달리기로 한발 더 나아갔다며, 달씨는 말했다.
"느렸다, 그러나 즐거웠다."
대회란 것은 더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결승전을 향해 달릴 텐데, 그 느낌은 어떨까 더욱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