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덟 번째 관찰: 마라톤 엑스포와 마라톤 용품

오, 의외로 챙길 게 많은 거였어.

by 경쾌늘보


마라톤 엑스포란?


“나는 글렀어! 가서 번호표 챙겨.”

달씨의 남편이 말했다.


"아니 전쟁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이 비장하고도 난감한 상황은 무엇인가."

한 번도 허리가 아픈 적이 없던 달씨의 남편은 왜 그날, 그때 허리에 찌릿 급성 통증이 왔던가. 그럴 때 쓰는 단어가 ‘하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3초 고민한 달씨는 미안한 마음으로 금방 다녀오겠다 하고 딸과 함께 Sydney Marathon Expo라고 쓰여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마라톤 엑스포가 무엇인지 감이 전혀 없는 달씨는

"번호표는 배송해 주면 좋을 것을 왜 여기까지 오라 가라 한단 말이더냐" 투덜거렸다. Bib 데스크에서 번호표를 수령하니 실감이 났다. 대회에 왔다는 것을. 다음 코너에는 시드니 배경의 스폰서 포토존이 있고 줄이 길었다. 쉴 틈 없이 노출되는 스폰서 로고들과 물건들. 마라톤 엑스포는 거대한 마라톤/달리기 마케팅 전시 시장이다.


Sydney Marathon이라 찍혀있는 마라톤 옷들과 신발, 액세서리까지 전시되어 있는 곳을 두리번거렸다. 그 사이 놀랍게도 달씨의 남편이 절뚝거리며 아들과 함께 엑스포에 나타났다. 허리가 나아져서 걸을 수 있어서 천천히 왔다 한다. 천만다행이다. 그렇다면 달씨 출전 이상무?!



마라톤 쇼핑


오 견물생심이여. 물욕 없이 살기 좋은 애들레이드에서 구하기 어려웠던 물건들을 보니 고요했던 물욕이 슬슬 올라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처음 마라톤인데, 나를 위한 선물?"

본인이 묻고 본인이 즉답한다.

"노 프라블럼"


그런데 문제는 엑스포 2일째인데 인기 많은 사이즈들은 매진이라 물건이 거의 없다. 모자를 사고 싶었던 달씨는 모자 ‘솔드아웃’이라는 말에, 마라톤 싱글렛을 대신 집어 들었다. 평소 민소매티셔츠를 입지 않는 그녀는 첫 달리기 대회이고 더구나 남의 도시이니 팔뚝을 들어내고 달려보기로 했다.


"마라톤 쇼핑이란 이런 것이구나~"

젤 섹션을 기웃거려 보는 달씨.


이웃 마라토너님 알려준 다리에 쥐가 날 때 먹는 크램픽스 (CrampFix)와

탄수화물 보충용으로 먹는다는 에너지젤의 여러 가지 맛을 시음도 해보고 몇 개 골랐다.

그리고 그것들을 담을 러닝밴드도 구경했다. 훅크나 버클 같은 플라스틱이 있는 것보다 전체가 천으로 되어 있는 밴드 타입이 좋다는 하와이 K의 조언을 떠올렸다. 속옷처럼 발을 넣고 몸통으로 끌어올려 입었다 벗었다 하는 형태라 매장에서 착용해 보는 것이 민망한 달씨는 후딱 입어보고는 사들고 나왔다.

테이핑밴드도 필요했지만 오기 전에 약국에서 산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날씨가 더워 땀이 나고 그곳에 옷자락에 계속 닿으면 발진이나 상처가 생길 수 있으므로 바셀린 같은 로션을 바르는 것을 어느 영상에서 본 달씨는 결국 천연재료의 쏠림방지용 크림도 샀다.


마라톤 엑스포 전시장은 한눈에 쏙 들어오게 구성한 오픈 공간이 아닌 길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게 구성을 해놓았다. 엑스포란 그런 곳이었다. 있는 시간과 털리는 지갑의 상관관계 주의가 요망되는 곳. 전과 같지 않게 요즘따라 사람 많은 곳 꺼려하는 달씨는 가족들과 엑스포장을 빠져나왔다. 가방에 쏠쏠찮은 용품들을 채워서.



마라톤 용품들


달리기를 시작하며, 그녀는 그저 똘똘한 운동화와 땀이 잘 마르고 가벼운 스포츠웨어만 준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라톤이 다가올수록 그 이상의 준비물이 필요한 새로운 세상에 들어온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속도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용품이나, 속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용품들을 민감히 구별하며 선택하는 듯하다. 적어도 마라톤 대회에서는. 그렇다고 달씨가 이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어떤 속도에는 관심이 없는 달씨는 그저 좀 더 안 아프게, 덜 힘들게 달리고 싶은 것이 용품의 목적이었다.


달리기를 시작하며 그녀 역시 신발에 호기심이 생겨버렸다. 달씨는 운동화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걷거나 일상생활 용 구별 없이 하나로 사용했다. 하지만 뛰어 보니 운동화도 기능별로 매우 세분화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 운동화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하니 이전에는 관심 밖이던 러닝화 세일에 눈이 갔다. 매장 가서 신어보거나 추천받은 신발들을 하나둘씩 샀다.


평판이 좋고 인기가 많은 신발이지만 자신에게는 안 맞는 신발이 있고(Hoka), 마라토너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어보니 찰떡인 신발이 있었다(OnRunning). 그녀는 신발끈이 잘 풀리는 것 빼고는 문제가 없던 헌 신발을 신고 달리기로 했다. 마라톤 용 신발끈 안 풀리게 묶는 방법까지 온라인에서 팁을 얻어서 단단히 묶어 보았다.


신발에 이어 양말, 그녀는 양말까지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으로 변했다. 백 프로 면양말은 장거리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너무 두꺼워도 너무 얇아도 힘들었다. 그녀는 러닝용 양말들을 이것저것 몇 달간 신어보고 장거리 연습 때 신었던 양말을 신기로 했다.




대회 전날


달씨의 대회 전날은 상상과 매우 다르게 흘러갔다.

이론적으로는 다리를 아끼고 몸의 피곤감을 최소로 해야 하는 날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다음 날 출발할 장소를 혼자 답사하러 갔다. 대회 준비로 스텝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스타트가 어디 있는지 찾는 중 다른 사람들과 눈이 마주쳐 인사하였다. 그들은 멜버른에서 왔고 시드니 대회는 매년 온다기에 달씨는 출발지점과 진행방향을 물어보았다. 예상한 것과 반대방향이어서 물어보길 잘했다 싶었다. 이제 막 햇살을 받는 하버브리지 북단 주변의 그림같은 풍경을 눈에 가득 담고 기분 좋게 시작했다. 24시간 뒤면 한창 달리고 있겠구나 상상도 해보니 실감이 났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였다.


그리고 오후, 달씨 가족은 각자의 위시리스트 장소와 쇼핑을 위해 광범위한 동선으로 시드니를 누리다 보니 16Km를 걷게 되었고 다리도 부었다. 핸드백도 들기 어려울 만큼 어깨도 아파왔다.

숙소에 돌아와 아들에게 무릎과 어깨 테이핑을 받는 호사를 누린 달씨, 마라톤 덕에 아들에게 이런 서비스를 받는다며 내심 아들이 기특하고 기뻤다.



생애 첫 레디 샷


다음 날 처음 주로에 서게 될 달씨는 살짝 긴장되었다. 숙소에서 어떤 옷을 입을지 무엇을 챙길지 적어보고 꺼내보았다. 모자, 탑, 반바지, 양말, 신발, 브라와 속옷까지 신경 쓰였다.


평생 처음 달아보는 배번을 옷에 핀으로 고정시키고,

대회 날 쓸 가벼운 선글라스를 챙기고,

폰과 이어셋 그리고 워치를 충전시켰다.

에너지젤과 크램픽스 그리고 약간의 캔디와 손수건도 챙겨 러닝밴드에 넣었다.

맨몸으로 달리는 것 같지만 벌써 17개 용품을 입거나 가지고 달리는 것이다.

대회 날 새벽에 먹을 것까지 챙겨 놓았다.

"오, 의외로 챙길 게 많은 거였어." 달씨는 무척 신기했다.

자신이 이 용품들을 챙기고 있는 러너라는 것이.


‘‘사람들이 마라톤에 입고 가져갈 것을 몽땅 모아 사진을 찍고, 그걸 레디 샷이라고 하던데 나도 찍어볼까 레디샷?” 하며 달씨도 찰칵 사진을 남겼다.


사진도 찍었으니 선수는 일찍 자야 한다며 홀로 침대로 쏙 들어갔다. 가족여행으로도 고른 숙소였기에 23층 통유리로 시드니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일 건널 하버브리지와 그 옆 하얀 곡선지붕을 가진 오페라 하우스, 그리고 바다 위로 떠다니는 배들이 내는 잔잔한 조명들.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잠 자기 아까운 야경이었지만, 이런 풍경에서 잠이 드는 것도 축복이다 싶을 정도의 풍광을 보며 쾌적한 침대 이불에서 눈을 감았다.


그런데 막 잠을 청한 그녀의 귀를 성가시게 하는 소음이 있었다. 난데없는 우퍼 스피커와 쩌렁쩌렁 음악소리. 잠이 다급한 달씨는 프런트에 무슨 일인지 문의해 보니 근처 나이트클럽이라 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토요일 밤이니 그래 놀고 싶겠지. 이해는 되나 밤이 늦도록 잦아들지 않는 소음에 그녀는 아들의 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을 빌려 끼고 겨우 꿈나라로 자신을 밀어넣었다.


그녀는 이제 정말 레디(ready)일까? 즐길 준비.





한편, 그녀가 잠들기 전에 책상에 적어 놓은 메모를 살포시 공개한다.


<첫 하프마라톤을 앞둔 너에게>


출발지로 가는 길에 수많은 다른 러너들을 만날 거야.

흥분감 긴장감 모두 웃으며 즐겨.


출발 전 웜업할 때 그 길쭉길쭉 피지컬들과 프로페셔널하게 생긴 사람들이 뽐내며 몸을 풀 때,

그때도 여유 있게 네가 하던 스트레칭을 하길 바래.


출발 총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할 때,

너의 속도로 가길 바래.


처음 1-2km는 심장이 요동치며 숨이 가쁘고 몸이 리셋된 것처럼 느낄 거야.

이렇게 힘들어서 21.1km를 할 수 있을까 다시 의심, 불안이 엄습할 수 있어.

기억해. 처음에만 그래. 할 수 있다 생각해.


오르막이 나올 거야. 더 많은 오르막 더 심한 경사도 연습했었어. 근육이 기억하길 바래.

잘 올라갈 수 있을 거야. 힘들면 걸어도 돼.


달리다가 어딘가 통증을 느낄 수도 있을 거야.

그럴 땐 무리하지 마. 무시하지 말고 쉬었다 가도 돼.


한걸음 한걸음 너를 둘러싼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눈에 담길 바래.

너의 발로 다 가볼 수 있는 이 기회를 고스란히 즐기길 바래.


분명 끝은 있다.

견디길 바래.

결승선이 곧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마지막에 잊지 않고 웃으며 들어오길 바래.

얼굴은 벌겋게 익고 몸도 힘들겠지만 미소를 보이길 바래.

모두가 보고 있잖아.


쫄. 지. 마~~!!




그녀의 시간은 첫 하프마라톤 날 새벽으로 가고 있었다.


IMG_9189.jpg
IMG_9190.jpg
레디샷 그리고 대회 전날 밤이 오는 시간



keyword
이전 08화일곱 번째 관찰: 러너, 시드니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