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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관찰: 러너, 시드니로 출발

마라톤이라 쓰고 여행이라 읽는다.

by 경쾌늘보


대회 일주일 전


드디어 대회가 일주일 앞으로 성큼 왔다. 곧 해야할 이른 기상 연습을 해보자 하여 5시에 알람을 맞추어 눈을 떴지만 껌뻑이다 다시 잠이 들었다. 미라클 모닝이니 그런 것은 달씨와는 다른 세상 얘기인가 보다.


달씨는 '대회 일주일 전에는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러너 전문 잡지에서 검색해 보았다.

마지막 일주일은 Tapering 기간이라 부른다. 운동량을 줄이는 시간이다.

1) 달리기는 거의 하지 말고, 한다면 이지 페이스로 5k 정도만 천천히 2-3번 해라.

2) 대회 가이드를 잘 읽어보아라-대중교통 이용, 번호표 픽업 등.

3) 대회 당일 용품들을 미리 챙겨라.

4) 대회 당일 페이스 등 계획을 적어보자.

5) 대회 생각 말고 대회 외 다른 관심사를 생각하며 긴장을 풀어라.

6) 대회 2-3일 전부터 카브 로딩-탄수화물을 보충해라.

7) 절대 릴렉스 해라.

8) 근력운동이나 집안일도 하지 마라.

9) 잠을 충분히 자라.

10) 물을 많이 마셔라.

그녀는 대회 일주일 전이 자신과 맞는다고 좋아했다. 공식적으로 운동을 하지 말고 쉬라고 하니까. 원래 잘하는 것들이니까, 특히 5번부터 10번까지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다나 뭐라나.




9월의 남반구


남반구에 9월이 오고 반팔도 아이스커피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급변했다.

한국도 여름에서 가을 며칠 안되고 겨울로 가듯, 남쪽 호주도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은 그토록 짧고 여름이 봄을 밀어내는 듯 했다.


시드니 마라톤이 점점 코앞으로 다가와 달씨는 고민했다. 어떤 복장을 입어야 할지. 9월 중순이면 예년이면 새벽엔 조금 차다 싶은 온도라 반팔을 입나 긴팔과 잠바를 입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일기예보를 보니 그 고민은 단번에 해결되었다.


시드니 마라톤 당일 온도가 30도라는 예보이다. 주최 측도 예상치 못한 날씨에 당황스러운 듯하다. 급수대와 의료 어시스턴트를 늘리고 안전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공지 이메일이 수시로 왔다. 달씨가 달리기 연습 한 이래로 가장 높은 온도였다.



출발, 여행이다


대회는 일요일이었다. 달씨가 사는 애들레이드에서 시드니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걸린다. 대회 전날인 토요일에 도착한다면 번호표 수령이나 코스 답사 등이 빠듯할 것 같아 금요일에 출발하기로 했다. 사실은 하루라도 일찍 가서 시드니 여행을 하려는 꼼수가 깔려있었다.


여행을 참으로 좋아하는 달씨는 평소 집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시간에 깨우지 않아도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산책하는 것이 그녀의 여행 시그니쳐였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좀 더 특별한 여행이 될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묘했다. 달씨는 하프 마라톤 ‘완주’라는 미션에 대한 기대반 걱정반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는 완주를 포함한 이번 ‘여행’에 대한 특별함이 커졌다.



마라톤이 좋은 이유


그녀가 마라톤 대회가 특별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평소 차들이 점령한 도로를 사람이 차지하는 유일한 날이기 때문이다. 차나 다른 교통수단으로 휙 둘러봐야 하는 장소들, 혹은 안전을 위해 도보가 엄두가 안나는 도로들을 신호 정지나 차들의 눈치 보는 일 없이 통행이 보장이 된다. 그 위를 오로지 사람이, 두 다리로 다닐 수 있는 날이다. 시드니의 하버 브리지를 바퀴 없이 지나가고 오페라 하우스를 향해 달려갈 (걸을) 수 있는 날이라니! 그 자유함을 누리며 참가자마다의 대서사시가 쓰일 날. 그 무리 중 한 사람인 것만으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응원단과 함께


달씨는 생애 첫 달리기 대회를 가면서 혼자 가야 할까 가족들과 함께 가야 할까 여러 번 고민을 했다. 가족이라고는 이 넓은 호주 땅에 딸랑 4명뿐. 생각할수록 함께 시드니 간 지 오래된 것 같아서, 엄마로서 시드니에서 ‘가족여행’도 할겸, 러너로서 ‘응원단’을 대동하기 위해 가족이 함께 가기로 했다. 첫 대회이니만큼 결승선에 들어올 때 남의 도시에서 그래도 가족의 응원이 있으면 너무 기쁠 것 같았다.


서울에서 제주도 가는 그 설레는 시간을 누릴 요량으로, 애들레이드에서 시드니 가는 비행기 좌석을 전처럼 한 줄에 붙여 안지 않고 같은 열로 예약하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 4 식구가 각자의 여행을 하는 것처럼 서로의 뒤통수를 보며 말이다. 녀는 새로운 시도를 정말 좋아하나 보다.


하지만 출발 전날, 에 절어 늦게 퇴근한 성인 남자와, 에 절어 내일 어디를 가는지 관심도 없는 청소년 남자, 여느 때 같으면 패킹 리스트 먼저 짜서 카운트다운하며 짐 챙기는 재미를 즐겼으나 왠지 피곤함에 짐 싸기도 귀찮다 하는 소녀, 그리고 펫시터에 맡겼는데 처음으로 분리불안 있는 것 같다고 연락온 강아지까지 신경 쓰고 챙기다 보니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하프 마라톤을 하고 온 듯 몸과 마음이 지치니 설렘은 잠시 외출한 듯했다.



오! 시드니


출발 아침 첫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비행기 좌석에 앉았는데 비행기 이륙이 지연되고 있다. 시드니의 두터운 연기 때문에 공항 사정이 있어 지연된다고 했다.

"무슨 일이길래?" 궁금했지만 어제저녁 강아지를 맡기고 짐을 싸고 첫 비행기 타느라 새벽 3시에 나온 터라 뉴스를 찾아볼 힘도 없는 달씨는 비행기가 뜨기만을 기다리며 살짝 잠이 들었다. 20분 뒤에 비행기는 활주로를 타고 시드니를 향하여 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시드니!>, 달씨가 이번 하프 마라톤을 준비하며 먼지에 쌓여있던 그 책을 얼마 전 다시 꺼내 읽었다. 무려 20년도 넘은 책이라는 것에 새삼 놀랐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취재와 원고 차 시드니에 머물던 이야기였다. 달리기와 담쌓고 살던 시절 읽었을 때와 사뭇 다른 경험이었다. 마라토너인 작가 하루키의 시선으로 바라본 시드니 올림픽 마라톤이 가까이 눈에 들어왔고 코스 묘사나 마라토너들의 행동들을 유심히 읽게 되었다. 그곳을 느림보 몸으로 직접 달리게 되었다니! 달씨는 피곤함에 사그라 들었던 감정들이 시드니에 가까울수록 살아났다. 감동과 긴장 사이에서 시드니에 랜딩 하였다.


도착해 보니 비행기 출발을 지연시킨 시드니의 짙은 스모그와 뿌연 공기에 대해 누군가가 말해줬다. 산불 (bushfire) 위험을 줄이기 위한 위험물 제거 (hazard reduction)을 위해 고의적으로 일부분들을 태웠다고. 여름이 오기 전에 종종 있는 일이긴 했다. 그런데 마라톤을 코 앞에 둔 이 시점에서 했을까하는 의문이 잠시 들었지만 오후가 되니 모든 것이 괜찮아 보였다.

시드니는 시드니답게 그대로 있었다.



예상치 못함과의 만남


공항을 빠져나와 번호표를 찾으러 마라톤 엑스포라는 곳을 향해 나선 달씨와 가족들. 시드니는 전에 몇 번 왔지만 엑스포가 있는 장소는 생소한 지역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애매해 보이고 새벽 비행으로 피곤한 그들은 우버를 타고 이동했다. 목적지에 내렸지만 푯말이 보이지 않아 우왕좌왕 찾던 중, 갑자기 “억!”하는 소리가 들렸다. 달씨의 남편의 입에서 나온 비명이었다. 과로와 바쁜 일정 때문이었는지 갑자기 허리에 문제가 생겨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바로 마라톤 엑스포 코 앞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게 되었다.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엑스포에 갈 수는 있을까, 마라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많은 생각들이 달씨에게 달려든 찰나였다.


첫 하프 마라톤, 비행기까지 타고 온 시드니, 어쩌지? 그녀는 순간 고민했다.

여행은 늘 예상치 못한 일들의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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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시드니 마라톤 며칠 앞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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