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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관찰: 21Km를 달리다

하프 마라톤, 재미있을 일인가.

by 경쾌늘보
'자신'에게 감동을 받는 일이 있었던가



새벽


눈떠보니 이미 마라톤 출발시간이라 식은땀이 절로 났다. 다행히 꿈이었다. 달씨는 몇 번이나 늦는 꿈을 자다 깨다 하다 잠에서 깨니 새벽 2시 반. 알람은 3시 반으로 맞춰두었다. 잠만보 달씨는 한 시간이라도 더 자겠다며 눈을 붙이고 3시 반에 기상했다.


일어나 식사를 준비했다. 새벽 3시 반에 뭔가를 먹는 것은 그녀 평생 없던 일이었다. 먼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바나나 1개, 모닝롤 2개를 블랙커피와 먹었다.


새벽 허기짐이 채워지니 긴장감도 줄어들고 마음 한편은 설렘이 작은 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따스한 물로 샤워를 하고 전날 밤에 챙겨놓은 옷과 소지품들을 챙겨 입었다.

드디어 하프 마라톤 날이라니! 전투준비 완료?

자는 아이들에게 “이따 결승선에서 보자~.” 뽀뽀를 해주고 달씨 남편이 출발지까지 함께 동행해 준다고 하여 함께 나왔다.

달씨가 머문 숙소에서도 마라톤 번호표를 단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함께 탔다. 새벽 5시 전인데, 반팔 차림으로도 춥지 않았다. 더울 예정이라는 예감이 든다.


출발 한 시간 전에 도착하라는 공지에 맞춰 새벽 5시 전에 도착했을 때 세상은 아직은 어두웠다. 처음 보는 거대한 임시화장실은 만리장성 같이 길었고 줄 서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러너들이 열심히 웜업을 하리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줄을 서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잔디밭에 호주 캥거루처럼 누워 앉아 쉬고 있었다. 아마 해 뜨는 것을 보려는 것 같았다. 몸풀기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마라톤 전 행사 같은 공식 준비체조 시간도, 출발 전 간식도 없었다.


달씨는 출발지에서 많이 긴장되지 않는다 하면서 물을 두 컵이나 마셨다. 아마 긴장모드였던 것 같다.



출발


하프코스 Gun time은 5:45였다. 엘리트 그룹부터, A, B, C 그룹이 차례대로 대기했다. 달씨와 같이 처음 참여여서 기록이 없거나 느린 사람들은 C그룹이었다.


MC의 새벽을 깨우는 기운찬 멘트와 함께 '탕' 총소리. 환호성과 함께 드디어 출발이 시작됐다.


출발은 오르막이었다. Bradfield Park에서 하버브리지까지 올라간다. 경사가 크지 않았지만, 그 길은 예상보다 짧지 않았다.


하버브리지 차도를 가로질러 달린 순간,

"이곳을 달려보고 싶어서 이곳까지 온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마어마한 엔도르핀 분사 구간이었다. 달씨의 흥과 힘이 솟구쳤다. 정말 신나는 구간이었다. 처음 1km였으니까.


하버브리지 끝부분에 첫 응원단인 고등학교 밴드가 신나게 연주하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달씨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5km


예년과 같지 않게 당일 날씨가 더울 거란 예보로, 워터스테이션(급수대)은 공지대로 많이 늘려놓았다. 2.5km 지점에서 첫 워터스테이션이 나왔다. 코스는 Centennial Park 전까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었다. 달씨는 요리조리 피해 가며 앞질러 보기도 하는 여유를 부렸다. 5km까지 재미있게 달리며 그야말로 ‘펀런’했다. 오늘 가벼운 느낌이야 하는 그녀의 독백이 들리는 듯했다.


센티니얼 공원에 들어서기도 전, 7km 구간에서 이미 선두 선수들이 결승선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정말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이 달씨는 인상적이고 부럽기도 했다. 그 순간, C 그룹에 속한 달씨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착각을 했다. "아, 반환점이 얼마 안 남았구나." 그렇지만 그건 불쌍한 착각이었다.



10km


공원의 길은 계속 구부러져 있었고, 반환점은 보이지 않았다. "공원이 이렇게 길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녀 인생에 처음으로 공원이 지루하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길고 긴 공원 속 코스를 달리며, 결국드디어 반환점을 만났다. "예쓰!" 했지만, 그 후 곧 달씨는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양쪽 다리에서 저림이 느껴졌고, 갑자기 쥐가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달리면서 본인에게 쥐가 날지 몰랐다. 그때 크램픽스 액상 타입을 먹어야겠군 생각했지만, "언제 먹어야 하지?" 한참을 가다가 주로 옆으로 빠졌다. 러닝밴드에 넣어놓은 젤 종류들은 더운 날씨와 달씨의 체온으로 뜨끈뜨끈. 크램픽스는 예상한 상큼한 맛이 아니라 미지근한 식초와 소금을 섞어놓은 맛이 나서 깜짝 놀랐다. 그래도 마셔야 했다.


곳곳에 그렇게 짜마시고 버린 젤 껍질들이 도로를 덮었다. 그 와중에 달리기도 좋지만 환경도 챙겨가며 할 수는 없을까 하는 오지랖을 펼치며 그녀는 쓰레기는 도저히 땅에 버릴 수 없어서 허리춤에 다시 넣었다.



15km


드디어 뱀 같은 공원 코스가 끝나고, 다시 도로로 진입했다. 지도에서 봤던 것처럼 공원을 나와 조금만 가면 마지막 Royal Botanic Garden 구간이었고, 그곳을 한 바퀴만 돌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리가 점점 더 저려오고, 발을 디딜 때마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마비가 오는 듯 무감각해졌다. 완주를 못하더라도 도로에 쓰러지는 일은 없고 싶은 그녀는 멈추었다 달렸다 하면서 욕심부리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눈에 주로에서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도 자주보였고, 의무대도 곳곳에서 러너들을 케어하고 있었다. 응급처치가 필요할 정도로 힘든 사람들이 보였다.


드디어 Royal Botanic Garden 코스를 거의 다 도는 구간에 이르렀다. 7:10에 시작한 풀코스 선수들이 반대편에서 휙휙 달려가고 있었다.


도로의 한 응원자가 그녀에게 “이제 거의 다 왔어! 1km만 가면 돼!”라며 격려해 줬다. 그 말을 듣고, "그래, 1km밖에 안 남았구나!" 싶었지만, 체감은 10키로 같았다. 내리막 후 갑자기 오르막이 나왔고,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냥 걸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0km


달씨는 장거리를 달리며 자신도 모르는 버릇을 하나 찾았다. 아니 만들어 낸 것일 수 있다. 그녀는 지치는구간에서 자꾸 아랫니로 윗입술을 깨물었다. 첫 펀런 구간에서 날렸던 미소는 출장 가고 씩씩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마지막 1km는 달려보기로 했다. 하지만 힘이 풀려 다시 걷게 될 때, 한 아주머니가 손짓으로 나를 빨리 오라고 했다.

"800미터도 안 남았어!" 그 말을 듣고, 다시 힘을 내어 달렸다. 그때부터는 내리막이었다.


저 앞에 뭔가 보인다, "아 저게 Finish Line이구나! 정말 끝났구나." 하고 달씨는 정신을 차리며 마무리를 잘하고 싶었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환하게 웃으며 들어가야지. 카메라도 있으니 웃는 얼굴로 가자 하하하.



21.1km


결승선을 통과했다. 땀이 굳으면서 소금을 뿌려놓은듯 툭툭 털리는 결정체들이 얼굴에 가득했다.

"내가 하프를 해냈다!" 그 순간, 정말 그녀가 하프마라톤을 완주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눈물이 날 줄 알았지만, 대신 웃음이 나왔다.


자원봉사자가 걸어주는 메달을 받았다. 얼마 만에 걸어보는 메달이던가. "완주 티셔츠는?"라고 물어보는 그녀에게 하프 코스 완주자에게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쉬운 마음도 잠시 들었지만, 달씨는 첫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사실에 온통 가슴이 감동과 환희로 벅차올랐다.



피니쉬 라인을 지나


결승선을 벅찬 감동으로 지나며 가족들과 사진 찍을일에 더욱 설레었던 달씨는 수많은 인파 어디쯤 가족들이 있으려나 계속 찾느라 결승선을 지나고도 한참을 더 달렸다.


그녀의 인생 첫 달리기 대회, 비행기로 모셔온 "나의 응원단, 그들은 어디에?" 찾다 전화해 보니 도로통제 때문에 걸어오느라 아직도 오는 중인 이방인 응원단. "그럴 거면 같이 달리지 그랬어!" 안심 반 심통 반 대답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때 멀리 있는 친구 하와이 K에게서 축하 카톡이 왔다. 어떻게 완주와 자신도 모르는 기록을 알았을까 물으니, 마라톤 앱을 통해 달씨를 추적할 수 있다 했다. 그렇게 하와이 K가 알려준 완주기록은 컷오프 타임을 넘기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컷오프 타임 안에 들어왔고, 완주했다. 잘했다!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자신에게 칭찬을 한껏 주고 싶은 달씨, 그녀의 첫 하프 마라톤 여정을 끝. 냈. 다.


이상한 일은, 잠은 3시간 반정도만 자고, 30도 날씨에 다리가 저리고 쥐도 나고, 지루했던 길들을 걸으며 달리며 하는 일, 게다가 느리기까지 한 이 짓이 재미있을 일인가.


몸과 다리는 무겁고 지친 날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뭐지? 왜지?"

"재밌어, 너무 재미있다."를 외치며 비행기를 탔다.

마음은 최고로 가벼운 그날이었다.


달씨가 스스로 가장 놀라운 것은, 자신에 대한 감동이었다. 자녀들을 키우며 감동의 대상은 외부로부터였다. 자녀들의 말이나 행동, 혹은 책이나 기타 매체물, 타인의 말과 선의 등.

엄마로 살아온 지난날들 중 '자신'에게 감동을 받는 일은 기억에 떠오르지 않았다. 감동을 줘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살아왔지 않은가.

그런데 오래 달리기의 완주란, 자신에게 감동 받을 수 있는 최초의 일이 되었다.


그토록 좋았던 구간들
끝~~다리야 잠시 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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