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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째 관찰: 우중런, 와이너리를 달리다

남호주 포도밭 10Km

by 경쾌늘보
그대 포도밭을 달려본 적 있는가, 그 특별함을!


러닝 클럽 가입


첫 하프 마라톤 완주 후 달씨의 발은 다행히 물집이 생기거나 까진 곳이 없었다. 다리에 약간의 근육통이 기분 좋을 정도로 있었다. 그녀도 달리기는 하프 마라톤 도전으로 마무리할 줄 알았다. 그것만 해도 인생 최대의 도전을 달성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리기라는 것이 그녀를 놓아두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달리기에 더 애정을 갖게 되었다. 21Km를 달성한 리듬을 이어가고픈 욕망이 생겨버렸다.


자기 자신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 그녀는 목표를 정해야 실행하는 타입이라, 정기적으로 대회를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대회가 없다면 금세 해이해질 자신을 알았기에 지속장치를 마련해 두는 것이었다. 검색해 보니 그녀가 살고 있는 남쪽 호주에도 달리기 대회가 정기적으로 많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러닝 클럽에 가입하고, 그곳에서 운영하는 월별 달리기 대회를 눈여겨보았다. 트레이닝을 위해 혹은 다른 멤버들과 같이 달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멤버십이면 할인이 적용되는 이유였다. 멤버들을 위한 매주 정기 훈련이라 크루러닝이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들어갈 용기는 안 났다. 느린 속도가 다른 러너들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그래서 연습은 전처럼 혼자만의 시간이 되었다.



남호주 와이너리


달씨의 2023년 9월 하프 마라톤 후 첫 달리기 대회는, 다음 달인 10월 McLaren Vale러닝 페스티벌에서 10Km 코스로, 대회 일주일 전에 급하게 등록을 해버렸다.


남호주는 호주의 시드니나 브리즈번 같은 관광도시가 아니다. 번쩍이는 관광 매력으로 전 세계나 호주 사람들을 크게 끌어당기지는 곳은 아니나, 주력하고 있는 산업 중 하나가 와인이다. 와인은 프랑스나 유럽의 몇몇 도시가 유명하지만,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도 초반에 유럽으로부터 이민해 온 이민자들이 남호주의 뜨거운 햇살과 토양에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기술을 정착시키고 발전시켜 온 덕분에 Barossa Valley라는 곳을 위주로 신세대 와인들을 생산하고 수출하고 있다. 덕분에 와인 애호가들은 남호주의 여유 있는 와이너리 지역에 들러 즐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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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클라렌 베일 (McLaren Vale) 달리기


그녀가 등록한 10Km 달리기 대회는 남호주의 한 와이너리 지역, McLaren Vale에서 열렸다. 이 지역은 탁월한 와인 생산지로 유명할 뿐 아니라, 달리기 코스도 포도밭 사이로 이어져 있어 특별해 보였다. 그곳은 달씨의 집에서 차로 1시간 채 안 걸린다. 남쪽 끝에 있는 바닷가를 갈 때 차로 지나가며 봤던 끝없는 포도밭, 그 포도밭 사이 길을 달린다는 생각을 하니 다시 가슴이 뛰었다.


러닝 페스티벌 당일이 되었다. 일기예보는 비 올 확률 80%였다. 달씨는 새벽 5시 반에 일어났다. 빗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혹시나 가족들이 함께 가려나 궁금했지만, 가고 오는데 2시간, 10Km 달리기면 1시간 정도 소요 예상하니 비 오는데 새벽부터 가족들을 다 깨워 데려가는 것보다는 주말인데 푹 자게 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또 새벽에 일어나 혼자 고속도로를 운전하여 와이너리에 가는 것도 운치 있겠다 싶었다.



우중런, 비 사이로


출발은 Hardy’s Wine이라는 와이너리였다. 코스를 미리 지도로 보았지만 다 똑같아 보이는 길이기에 다른 주자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녀는 주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릴지 말 지 또 고민했다. 차 창에 비가 억수같이 부딪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 오는 날 달리기 대회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신발과 옷이 젖은 채로 집에 돌아가면 감기나 몸살에 걸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달리기를 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축축한 양말을 신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우물쭈물하다 일단 출발지 근처를 돌아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아니다 싶으면 ‘빠꾸’하기로.


하프 코스 러너들은 이미 출발했고, 출발 전 사람들은 비를 피할 수 있는 작은 지붕 아래 다닥다닥 모여 비를 쳐다보고 있다. 달씨와 같이 아마도 언제 그칠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일까 고민을 하는 것일까. 이미 비에 젖어 추위에 오돌토돌 떠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마 아래 비 그치기 기다리는 러너들

출발선과 결승선이 동일한 코스였다. 주변에 메달들과 물과 사과와 바나나가 있는 텐트가 있었고, 비가 오는 중에도 자원봉사자들은 준비물들을 챙기고 있었다. 달리는 사람들이야 제 돈 내고 제가 달리는 맛이겠지만 자원봉사자들은 이 비에도 밝은 표정으로 각자 맡은 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고민 끝에 달씨는

"언제 다시 이런 비 오는 날에 달려보겠나?" 생각에 출발선으로 뚜벅뚜벅 향했다.

"덤벼보자. 까이꺼! 나 21Km 달린 사람이야!" 하며 달씨는 깡이 생겼다. 근거 없는 자신감인가 보다.








포도밭을 달리다

오래된 기차가 놓여있는 코스

지역 특성에 맞는 이름인, The Shiraz Trail이라는 트레일 코스를 달린다. 예전엔 작은 기찻길이 있었다 한다. 마라톤 코스 시작 부분에 역사에 한 부분으로 남은 기차가 놓여있다.


10월, 남반구의 봄에는 와인으로 만들어질 포도들이 광대한 포도밭에서 이제 봄 새싹들이 피우고 있었다. 비에 젖은 포도잎은 물기를 머금고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구름 사이로 짧게 비친 햇살에 물방울이 반짝이며, 포도밭 전체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시작하자마자 500m 갔을까. 오른쪽 다리가 쥐가 날 조짐이 보여 옆으로 빠져 다리를 풀어 주는 동안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 그녀를 추월해 가는 많은 사람들을 좌절스레 관망했다. 그래 ‘완주만 하자’로 태세를 전환했다. 그러다 목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이라도 추월하면 드는 자만감의 자신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연초록의 잎들이 돋아나고 있는 포도밭과 옅은 향이 올라오는 것도 같은 동화적 배경과 평이한 코스에서는 더 빨리 잘 달릴 수 있을까? 출발 전 하프 뛴 사람이라는 그 자신감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불과 한 달 전, 본인이 21Km 달린 일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10Km가 마냥 길고 힘겹게 느껴졌다.


비가 사선보다 더 누운 각도로 샤워기를 뿌리듯 얼굴과 몸을 계속 적셨다. 하지만 비가 안 왔다 하더라도 더 빨리는 못하고 똑같이 달렸을 것 같았다.


코스는 고요했고 러너들은 한적했다. 그 비에 반환점을 돌아 오가는 러너들은 꼭 눈을 마주치며 서로에게 응원과 격려를 생략하지 않았다. 비를 쫄딱 맞으며 묵묵히 가는 러너들 사이엔 왠지 모를 동지애도 느껴졌다.


느리더라도 계속 달릴 수 있는 것이 숙제임을 지난번 대회 때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간 연습이 부족했는지 멈추지 않는 지속성 있는 패턴은 아직 먼 길처럼 여겨졌다. 뛰다 걷다를 반복하는 자신을 마주하며 말했다.

"달리기, 아직도 멀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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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Finish, 준비와 응원까지 해주는 자원봉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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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우중런, 포도밭 사이를 달리다



어쨌든 완주


겨우겨우 결승선을 통과하자, 자원봉사자가 따뜻한 미소와 함께 메달을 목에 걸어주었다. 혼자 온 그녀를 위해 사진까지 찍어주는 그 모습에, 마음속에서 고마움이 그날의 비처럼 내려왔다.


와이너리에서 열린 대회인 만큼 대회 후 와인 한잔 하면 금상첨화겠지만 젖은 몸과 운전을 위해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도 달리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모습이. 그러한 날씨 조건에도 건강하게 달릴 수 있음이 그녀는 감사했다.


자동차로만 다녔던 그곳을, 이번에는 달리기로 경험했다. 차로 갔을 때 대략 둘러보고 와인 시음을 하고 앞마당에서 소풍하고 왔던 그곳을 다른 방식으로 시도할 수 있음이 내내 즐거웠다.

달리기가 주는 매력이다.



'사실, 이 대회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 있었다. 바로 메달 디자인! 포도송이 모양의 메달은 못 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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