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2번째 관찰: 쇼핑 대신 러닝

소비 보다 숨결

by 경쾌늘보
물건을 비우고 대신 땀을 채우다


| DNS, 그 찝찝함에 대하여


달리기 대회는 익숙한 코스가 좋을까 새로운 곳이 좋을까?


연말이 다가왔을 때 달씨가 가입한 러닝클럽에서 광고가 올라왔다. 한해의 마지막 달리기 스케줄. 장소를 보니 달씨가 자주 갔던 바닷가 코스이다.


호주의 11월은 더위가 시작하는 무렵이다. 새로운 코스를 즐기는 그녀였지만, 익숙한 길을 대회로 달리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대회는 일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전날 종일 일정이 있던 달씨는 저녁에 침대로 다이빙을 했다. 다음 날 아침 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의 늪이었다. 피곤하다며 핑계 리스트를 접었다 폈다 했다. 대회 당일 새벽 알람소리에 가까스로 깼지만 영 일어나지를 못한다. 시간이 흘러 결국 바닷가 코스 출발선에 도착했어야 하는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참석하지 못했다.


DNS-Did Not Start를 해버린 것이다. 스포츠대회에서 DNF-Did Not Finish를 하는 경우는 종종 보았다. 그러나 선수로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DNS, 시작도 하지 않는 일은 좀 비겁해 보인다. 달씨는 경기에 있어서 ‘시작했지만 완주하지 못한 것’과, ‘시작도 하지 않은 것’은 다른 차원이 다른 것임을 그날 느꼈다. 갈 수도 있지만 안 간 것이 집에서 현장 동영상을 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엘리트도 프로도 아닌 초보 러너이지만, 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결정을 책임져야 함을 배웠다. 그 나이에도 뭔가 새로운 깨달음 혹은 배움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익숙한 코스냐 새로운 코스냐 보다 ‘시작하느냐’가 우선이다. 러너로서 쓴맛 단맛 다 있지만, 달씨는 이후로는 DNF는 할 수 있을지언정 DNS의 찝찝한 맛을 느끼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달리기를 통해 스스로에게 약속을 행하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통해 1cm의 성장을 하고 있다고 느낀것 또한 놀라웠다.




쇼핑 대신 러닝


DNS 사건이 지나고 연말이 더 가까왔다. 연말에는 달씨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행사가 많다. 달씨 탄생일이 있고, 각종 크고 작은 연말 모임들, 학교 행사들 그리고 크리스마스 연휴까지 일 년 중 캘린더에 스케줄이 빼곡한 한 달이다.


SALE이라는 단어에 자동 반사했던 달씨, 그 단어를 보면 왠지 들러야 할 것 같고, 사야 할 것 같은 작은 욕망이 찰랑였다. 옷장은 차 있었지만 계절이 바뀌면 매년 입을 옷이 없고, 외출할 때면 맞춰 입을 옷이 없다고 투덜거리며 다음 세일 기간을 기다려 왔다.


11월 마지막 주 금요일, 사이버 데이. 팬데믹 이후 크리스마스 세일보다 더 강력한 세일로 자리 잡았다. 세일도 인파도 여전했다.


하지만 달씨는 여전하지 않았다. 달리기를 한 후로 달씨는 더 이상 ‘Sale’이라는 단어에 흔들리는 갈대가 되지 않았다. 사이버 데이에 마침 선물 사러 쇼핑센터에 나간 그녀는 미친 인파에 신물이 났다. 손에 쇼핑백을 가득 든 무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가까운 바닷가로 갔다. 바닷가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세일 대신 바다


쇼핑센터로 몰린 인파 덕분에 한적한 바닷가에는 휴가를 시작한 캠핑족, 서핑하는 사람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이나 벤치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담소를 나누는 연인들을 보였다. 그리고 걷거나 달리는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달씨는 새삼 자연에서의 사람의 몸선과 몸동작이 아름다워 보였다. 직선 같아 보이나 직선이 없는 자연의 섬세한 선들과 그와 어울리는 생명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움직이는 것들이 빠르든 느리든 투박하든 귀해 보였다.


한 시간을 달린 후의 땀맛. 그것은 한 시간 쇼핑 후의 피곤감은 비교할 수가 없다. 달씨는 딱히 사고 싶은 것이 줄었다. 이제 그녀의 쇼핑 리스트는 달리기에 맞는 용품들이 전부이지만 그나마도 사러 가는 시간에 조금이라도 달릴 수 있으면 좋았다.


그녀는 말했다.

“달리기는 사람을 밖으로 데려간다. 쇼핑센터의 물건보다 앞에 놓인 길을 더 찾게 한다.

달리기는 자본주의의 소비에서 자연주의 유희로 데려간다.


SE-101B5320-E2B5-4ECA-865F-CDEA3D24C31C.jpg
SE-BC1CF65D-ADFC-4B5F-9211-3253BF604FEB.jpg
SE-D78451A2-A50F-4D46-BE74-CD6A54EFA7B6.jpg
세일 대신 바다



미역국 대신 달리기


예전같으면 그녀는 생일에 여행이니 호캉스니 타령을 했었지만, 달리기 1년 차에는 달랐다. "생일에는 달리기지~"라며 마침 주말인 생일날의 달리기 대회를 찾아 새벽부터 혼자 1시간을 운전해 낯선 동네의 달리기 대회에 갔다.


그러고 보면 달리기는 혼자만의 시간, 그 자체로 미타임 (MeTime) 선물이다. 누가 미역국을 끓여줬네, 선물을 했네 안 했네 시끄러울 일도 없었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그날의 대회는 드레스 코드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콘셉트로 빨간색을 입고 오세요.’

그녀의 무채색 옷들 사이에서 빨간 옷은 커녕 양말도 없다니. 대신 가진 것 중 유일한 빨간색인, 립스틱을 진하게 발랐다. 이 정도 뽀인트는 예의지~하며 신나서 나갔다. 그녀는 ‘생일 파티도 이런 파티가 없네’ 하며. 이미 혼자 파티 분위기였다.


낯선 곳에서의 달리기. 빨간 옷이나 액세서리를 걸친 러너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빨간 싱글렛, 모자, 치마, 빨간 루돌프 헤어밴드나 코, 빨간 선글라스, 빨간 운동화… 많지는 않은 참가자들이 출발선에 모였다. 레드 물결 속 혼자 칙칙한 색이 민망하여 빨간 입술이 너무나 작게 느껴지긴 했지만, 대신 활짝 웃어 입을 크게 보여 강조하려 했다.


코스에서는 연장자인 할머니 할아버지 러너들과 스몰토크를 하기도 하고, 스쳐가는 사람들과 짧은 인사와 응원 혹은 손인사를 했다. 대도시의 달리기와는 달리 외곽으로 갈수록 인심도 정겨움도 여유 있는 것은 어느 나라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IMG_1668.jpg
IMG_1676.jpg
IMG_1675.jpg
드레스 코드: 레드
IMG_1677.jpg
IMG_1686.jpg
IMG_1687.jpg
Red Run



선물 대신 러닝


생일 선물? 그녀는 또 다른 10Km를 달렸다는 것과, 완주 메달 하나면 충분했다.

달씨의 연말은 쇼핑백 대신 발로 쓴 서사가 채워져 갔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괜찮았다.

혼자 달릴 수 있게 해준 가족들에게 오히려 감사했다.

자연에서의 땀과 자유가 달콤했다.


그녀에게

달리기는 단순히 운동의 하나라기보다,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 잡는 것 같아 보였다.

keyword
이전 12화11번째 관찰: 우중런, 와이너리를 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