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여성의 두 번째 하프 마라톤 완주
광기와 감동 사이, 두번째 하프 마라톤을
| 사이코라 부르리오
“뭐 하나 깊게 꽂혀서 남들이 보기엔 좀 미쳐 보일 정도로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영어로 뭐라 하지? 예를 들면, 마라톤을 하루에 한 번에 연속으로 일주일 하는 사람들을.”
달씨는 딸에게 물었다.
“사이코지. 누가 마라톤을 매일 그렇게 해? 사이코야 ”
Grit그릿을 쓴 Angela Duckworth는 그런 사람들을 Paragon of grit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패러곤 오브 그릿, 그 단어가 생각이 안 났던 참이었다.
운동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이라 달씨의 딸 입에서 Junkie나 maniac 이 나올까 싶었는데, 딸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딸의 눈에도 마라톤에 그 정도 미친 덕후에게는 그 단어가 제일 맞나 싶었다. 사이코.
| 7일 7 대륙 7 마라톤
달씨가 그들을 콕 집어 뭐라고 해야 할지 궁금했던 마라토너들이 있다. 얼마 전 한 러너의 책을 통해 알게 된 ‘그레잇 월드 레이스 (The Great World Race)’이다. 그리고 다른 기관이 운영하는 '월드 마라톤 챌린지 (World Marathon Challenge).
이름은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내용은 어마어마했다. 7일간, 7 대륙, 7번의 풀코스 마라톤! 달씨에게는 어나더 레벨이다.
하루에 한 번씩 마라톤을 7일간 하는데, 장소가 심지어 매일 대륙을 이동하는 것이다. 남극 마라톤을 시작으로, 남아프리카, 호주, 아시아, 유럽, 남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미 대륙에서 마무리를 한다.
매년 10월에 열리는 이 대회는 대륙 간 이동은 전용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로 한다. 참가 한정 인원은 50-60명. 달씨는 궁금했다. 얼마일까? 참가비는 45,000유로로 한화로는 약 7천4백만 원, 호주 달러로는 $79,000 정도였다.
이 대체 뭐꼬? 이 사람들 뭐꼬? 시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 대체 체력과 시간에 더해 재력까지 되는 이들은 누구일까, 일생에 한번 마라톤 하는 것도 대단함 그 자체인 그녀에게 7일간 대륙을 돌며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이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먼 얘기 같아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 호주 777 마라톤
그러다 그녀가 전에 참가했던 Bravehearts 자선단체의 지역 달리기 대회에서 받은 이메일 제목에 또 솔깃했다.
777 Marathon! 이것은 또 뭐지?
호주 내에서 7일간, 7개 주, 7 마라톤을 하는 것이라 한다. 호주 자체도 큰 대륙이어서 주 사이 이동은 비행기로 하며 7개 주요 도시에서 매일 마라톤을 하는 것이다.
방향은 서쪽에서 동쪽이라, 서호주 퍼스를 시작으로, 달씨가 사는 애들레이드에서 둘째 날 마라톤을 한다. 다음은 멜버른, 그리고 태즈메이니아의 론세스톤, 다음은 시드니, 캔버라, 마지막으로 골드코스트에서 마무리한다.
그 넘들을 만나러, 함께 달리러
지구의 7개 대륙을 이동하는 사람들은 볼 수 없겠지만, 호주 내에서 777을 하는 그 ‘사이코’ ‘미친 러너들’을 꼭 보고 싶어졌다.
이메일에 애들레이드에 자원봉사자가 시급하다는 메시지를 보고 자원봉사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달씨는 초보 러너로서 무슨 마음인지 꼭 그들과 달려보고 싶어졌다.
마라톤은 7월 1일을 시작으로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내내 하는 그룹이 있고, 각 도시에서 한 번만 참가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엄마가 미쳤어요, 마라톤에
7월 초는 호주의 겨울의 절정. 고민도 되긴 했지만, 정키들 (endurance junkies) 혹은 마라톤 매니악들 (marathon maniacs)이라 할 수 있는 그 하드코어들과 출발선에 있고 싶어졌다.
못 말리는 달씨, 또 냅다 등록을 해버렸다. 무려 하프코스를! 이 정도면 등록병인가.
지난해 하프 마라톤을 위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에 연습했던 것을 떠올리며 다시 연습모드로 매진했다.
드디어 대회 날이 왔다. 평일 화요일이었다. 학교에 라이딩해줘야 하는 아이들에게 대중교통 이용해서 알아서 가라고 내몰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알았다. "우리 엄마가 마라톤에 미쳤어요."
777 마라톤, 애들레이드 달리다
아침 기온이 3도였다. 7시 출발이었는데, 가깝다는 생각에 늑장을 부리는 달씨. 3도의 아침에는 어떤 복장을 입어야 할까? 고민 끝에 추워도 21Km를 달리면 몸이 더워질 테니 강한 척, 멋진 척 반팔 반바지지!
"확실히 두 번째라 전보다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군." 했지만 역시나 그녀의 몸은 아니었다. 배가 살살 아프더니 도착하기도 전 급히 주유소 화장실을 들러야 했고 이로 인해 시간이 지연되면서 급기야 출발 10분 전에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웜업 스트레칭 없이 바로 출발.
출발선에서
헐레벌떡 도착하여 참가자들의 복장을 보니 나이 든 사람들은 긴팔을 입었고 젊은이들 중에는 탱크톱만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모자를 쓰고 장갑을 낀 사람들, 왠지 약해 보였다. 달씨는 입고 갔던 바람막이를 짐보관소에 맡기고 반팔만 입고 출발선에 섰다.
아직 어둡고 바닷바람 차가운 아침이었다. 전날 퍼스에서 마라톤을 하고 산 사람들, 777 그룹들은 지정된 옷과 배번이 달랐다. 아하 드디어 그들을 대면했구나!
참가자들이 예상보다 많지는 않았다. 100명이 안되어 보이는 무리가 출발 전 브리핑을 잠시 듣고, ‘탕’ 총소리에 각자의 워치를 누르고 출발했다.
코스는 Glenelg (앞으로도 뒤로도 같은 스펠링, 글레넬그) 바닷가 길 7Km를 3번 도는 것이다. 같은 구간을 반복하기를 안 좋아하는 달씨에게는 그 또한 처음 겪는 일이었다. 3바퀴. 풀코스 참가자는 6회를 반복해야 한다.
출발
얼마 안 되어 해가 뜨고 날이 서서히 밝아지며 바다의 수평선이며 그 위 배들과 갈매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참가자들의 얼굴도 보이기 시작했다. 참가자들의 평균 연령대가 높아 보였다.
할아버지 러너 두 분이 얘기 나누며 달리시고, 달리기가 버거워 보이는 체구의 아주머니는 그러나 너무 활기차게 마주칠 때마다 크게 인사를 했다.
한 참가자는 다리가 불편했다. 휠체어를 타지 않고 목발로 풀코스를 완주할 셈이었다.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한 다리로 묵묵히 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그 아침의 숭고한 풍경이었다.
달씨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달리며 코끝이 찡해졌다.
3번을 왕복해야 하니 몇 번이고 마주치는 러너들도 생기었다.
PB 탄생각, 그런데 너무 추워
그녀는 그날따라 순조로이 잘 달렸다. 페이스 좋았다. 숨도 차지 않았고 힘들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이대로만 하면 1시간대로 완주하며 대대적인 PB가 탄생할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추위였다.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3Km를 지났는데도 몸이 데워지지 않았다. 더 달리면 괜찮겠지 하며 달렸지만 거의 10Km가 되어서도 열이 나지 않았다. 그 또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제 손가락들이 말을 안 듣기 시작하고 발가락들도 얼기 시작했다. 땀은 전혀 나지 않았다. 추위가 가시지 않아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제 반 정도 달렸을 때 갑자기 발바닥이 찌릿하며 통증까지 왔다. 그렇지만 달려야겠다고 생각한 달씨는 멈추지 않았다.
발소리 숨소리
마침 그녀와 같은 페이스로 계속 옆에서 달리던 한 남자 참가자가 있었다. 이름이 마이클이라 한다. 그는 777 멤버였다. 뭐라도 얘기하고 싶었는데 얼굴까지 얼었다. 손만 겨우 흔들었다.
누군가와 함께 발맞추어 달린 적이 없는 달씨, 그 아침 고요한 바닷가에 발소리와 숨소리만 들리는 상황이 신기했다. 사람들이 이래서 러닝 파트너와 함께 달리는구나. 그런데 이성이면 안 되겠다는 앞서간 생각을 하며 계속 달렸다.
에너지젤 좀 까주세요
2바퀴 돌았다. 그 쯤 극도의 배고픔이 찾아왔다. 너무 허기져 주머니에 넣은 에너지젤이라도 먹어야 했다. 그런데 언 손이 말을 안 들어 도저히 까지를 못하겠다. 옆에 달리는 마이클에게 까달라고 할까 아니면 더 가서 자원봉사자에게 해달라고 할까 계속 고민했다.
출발지이자 반환점인 곳을 돌며 멈추어 한 자원봉사자에게 미안하지만 부탁하여 드디어 에너지젤 섭취. 그리고 짐보관소에 가서 바람막이를 찾아 얼어붙은 손과 몸으로 어기적 걸쳤다.
이제 7Km 남았다. 한쪽 발바닥 아래 통증이 상당히 불편하고 발가락은 추위에 움직이질 않았다.
두 번째 하프 마라톤 완주
그나마 바람막이 입고 마지막 힘을 다해 결승선을 통과했다. 호주 모양의 예쁜 메달이 목에 걸렸다. 달씨는 완주했다. 첫 하프 마라톤 후 10개월 만의 두 번째 하프 마라톤을. 기록도 더 빨라졌다.
그녀가 그토록 만나고 팠던 사람들과 얘기라고 하고 싶었지만, 춥고 배고프고 피곤했다. 결승선 옆에 마련되어 있는 마사지 서비스에 잠시 몸을 눕혔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바로 돌아가서 쉬기로 했다.
달씨의 두 번째 하프 마라톤.
추운 날은 절대 ‘딸랑 반팔 반바지’만 입지 않기로 해요!
비니에 장갑에 목스카프에 조끼까지 입었던 777 베테랑들,
그들이 추워서 혹은 약해서 그렇게 입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중년의 초보 러너는 또 몸으로 배웠다.
반팔을 입더라도 장갑은 꼭 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충분한 웜업 스트레칭은 필수 중 필수라는 것을.
광기와 감동 사이
그녀는 돌아가는 차 안에서 몸이 녹으며 마음도 녹았다. 불과 2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이 아침에 대해, 이렇게 인생의 두 번째 하프 마라톤을 한 자신에 대해. 그리고 다음 날이면 더 추운 멜벤에서 달릴 그들의 뒷모습에 대해.
그 일주일 간 달씨는 777 홈페이지를 정기적으로 보게 되었다. 잘들 달리고 있으려나 괜한 동지애? 에 (그들은 달씨의 존재조차 모르지만). 며칠 뒤 태즈메이니아의 론세스톤에서 열린 마라톤에서는 눈이 왔다. 달씨는 혼자 생각했다.
너무 추웠을텐데 어떻게 달렸을까?
그 대단한 마라톤 사이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