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걷던 추억의 그 길, 애들레이드 횡단 30Km
LSD, 장거리 연습
시드니 마라톤, 거사가 두 달도 안 남았다. 풀코스를 앞둔 달씨, 이제는 21Km를 넘어설 차례였다. 그녀는 들은 대로 LSD (Long Slow Distance), 장거리 훈련을 위해 애들레이드 도시를 가로지르는 그 코스에 다시 마음을 두었다. 작년엔 휴가 일정으로 참가하지 못했던 바로 그 길.
아직 가보지 않은 거리 30Km, 풀코스를 앞둔 시험이기도 했다.
새로운 숫자, 앞자리가 바뀐 30Km 이상을 연습해야 한다는 내적 압박도 있었지만, 실은 달씨가 좋아하는 코스여서 선뜻 신청했다.
애들레이드 도시 30Km 트레일
애들레이드는 동쪽에 높지 않은 산지(Hills)가 있고 서쪽으로 갈수록 완만하게 낮아져 바다로 이어지는 아담한 도시이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물이 동쪽 산에서부터 낮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흐른다. 이곳 사람들은 강(River Torrens)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소박한 물줄기이다.
이 도시가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물줄기를 따라 만든 토렌스 강 연결 트레일 (River Torrens Linear Trail)이다. 30Km (혹은 35Km)로 길게 연결된 산책로는 여러 지형과 풍경을 가로지른다. 유칼리툽스 나무 그늘들, 애들레이드 도시 한복판, 강물을 따라 길게 자란 갈대숲길, 멋진 주택가, 말들이 풀을 먹는 공원에 이어 파란 빛깔의 바다까지 이어진다.
차의 방해가 없고 안전하기에 걸어서든, 자전거나 스쿠터로든, 달려서든 누구든지 마음만 먹는다면 장거리 연습이 가능한 트레일이다.
달씨는 이 보석 같은 코스를 아이와 걸어서 횡단한 적이 있다. 물병 하나 들고 하루에 15Km씩 이틀에 걸친 횡단 여정. 아이는 힘들어하긴 했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힘듦과 땀을 같이 나누어 진한 추억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길 끝에서 먹은 파스타를 아직도 얘기한다.
그 길을 이번엔 달려서 하루에 가볼 수 있을 테니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준비
대회 전날 배번을 픽업하러 갔을 때 베테랑으로 보이는 자원봉사 할머니 러너에게 물어보았다.
“내일 온도에 옷을 어떻게 입는 것이 좋을까?”
울트라 마라토너인 할머니는 따스하게 조언해 주셨다.
“내 경험으론 추운 날에 나는 장갑보다는 목이든 팔이든 두르고, 길고 짧게 변형이 가능한 러닝 스카프 (혹은 neck gaiter)가 좋더라.”
마침 집에 있는 아이의 것을 팔에 둘러 추우면 손을 덮고, 더워지면 걷어 올릴 계획이었다.
대회 당일
7월 말, 아침 온도 5도.
달씨는 몇 주 전 경험으로 터득한 대로 낮은 온도를 위해 단단히 준비하고 나타났다.
러닝 스카프와, 달씨 역사상 가장 장거리인 만큼 무릎까지 오는 압박양말, 모자와 무선 이어폰을 챙겼다. 지난 대회로 얻은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무릎과 발에 셀프 테이핑도 하고 슬개건 밴드까지 장착했다.
누군가 그녀에게 말했다, 여진정벌이라도 가냐고.
이번에는 미리 도착하여 몸풀기도 하고, 출발!
초반
첫 부분에 언덕이 많았다. 이 구간만 지나면 거의 원만하리라 예상하며 달씨는 러너들 틈에서 언덕도 잘 뜀박질하며 오르니 기분이 좋았다. 코스는 애들레이드 도심을 중심으로 반으로 나눌 수 있다. 시티까지 15Km, 시티부터 바다까지 15Km 정도였다.
초반 풍경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트레일이다. 새들 바쁜 아침과 찬 공기 속에서 풍겨 나는 유칼립투스 향, 그리고 나뭇가지로 사이로 종종 비추는 햇살이 반가웠다.
중반 그리고 고비
정확히 몇 주 전 하프 마라톤 때 문제가 생겼던 14Km 지점에서 이번에도 발에 통증이 나타났다. 13Km까지 놀랍게도 5분대 페이스로 달리던 그녀의 속도가 떨어졌다. 시내 중심에는 교통도 많으니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나은가 싶었다. 한 명 슬쩍 사라져도 모를 일이었다.
"완주를 했다 한들 다음날부터 일상생활에 지장에 생긴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우버 불러 집에 갈까.
아니 반 왔는데 더 버티어 볼까.
가는 것과 멈추는 것, 어느 것이 지혜로운 걸까?"
그 나이쯤 되면 바로 답을 잘 찾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이 함정.
달씨는 끊임없는 고민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 점점 후미 그룹으로 쳐졌다. 그들은 다리를 절거나 신음을 하는 부상자들이 보였다. 서로 묻는다, “Are you ok?”. 다들 안 괜찮은데 괜찮다 한다. 달씨처럼. 그러면서 모두 계속 갔다.
지난번 교훈으로 후디를 입고 달렸지만 차가워진 손과 발이 녹는 시점은 20Km가 지나서였다. 손에 두른 스카프는 언 손을 커버하는 것보다 흐르는 콧물을 훔치는 용도로 더 유용했다.
뛰기만 하면 왼발 통증이 악화되었다. 달씨는 무슨 생각인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것인지 계속 걸었다 약간 뛰었다 하며 앞으로 움직였다.
반환점이 없는 코스여서 이미 빠른 속도로 반환점을 돌고 오는 러너들과 마주치며 기죽을 일은 없었지만, 오히려 계속해서 그녀를 추월하여 넘어가는 발자국 소리들이 계속 들렸다. ‘기록용 아니다, 장거리 연습용이다.’ 하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다들 어찌 그리 체력도 좋고 빠른 것인지.
끝자락
"내가 아는 한 거의 온 것 같다."
1Km를 남긴 지점에서 그녀는 풍경을 보았다. 파란 하늘만큼이나 멋진 코발트블루의 바다가 보이다니, 정말 다 왔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다. 늘어진 뒷자락 그룹 사람들이 듬성듬성 결승점으로 들어왔다. 통증을 달래는 동안 그녀 뒤로 들어오는 러너들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아까 부상자들로 보였던 참가자들 외에는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커플이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완주를 했고, 할머니 러너는 손을 허리에 짚고 들어왔다. 계속 걸었던 젊은 여자는 끝까지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자원봉사자들이 모두를 마지막까지 기다려줬고, 그 지점을 통과한 이들에게 축하 메시지와 허그와 메달을 걸어주었다.
달씨가 마라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 분명 끝이 있다. 결승점이 있다.
전처럼 그 길 끝에서 먹었던 파스타를 먹을 기운도 없었지만, 어쨌든 끝났다.
느렸지만, 42.195 앞으로
다음 날 참가자들의 결승선 통과 사진이 공개되었다. 달씨는 정말 가관이었다. 축 늘어진 어깨에 고개가 땅을 향하고 거의 엎어질 듯 피니쉬 라인을 들어왔다.
사진을 보니 결승선에서라도 정신을 차려볼걸 하는 후회와 창피함은 피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의 달리기가 한 뼘 더 자랐다.
최장거리 시도 후 두통과 부상을 얻었지만,
느렸어도, 아픈 발을 이끌고 피니쉬 라인을 넘었다.
그녀는 21Km 한계, 자신을 넘은 듯했다.
비록 느렸지만 더 가까워진 걸까, 42.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