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너의 부상, 그리고 킵초게
불청객 등장이요
30Km 거리를 끝내고 우버 타고 집에 온 달씨.
발을 내딛을 때마다 심상치 않은 통증이 올라왔다.
"인생 최장거리에 몸도 놀랐겠지." 하며 애써 가볍게 넘기려 했다.
집에 들어와 곧바로 러너의 동반자, 아이스팩을 발에 대고 진통제 한 알을 털어놓고 두통과 근육통과 자신도 잠재웠다.
며칠이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나을 줄 모르는 발.
괜스레 나이탓 하며 낫기만을 기다리니 풀코스 마라톤은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이었다.
달리기로 도파민 세례를 받은 러너들은 달리기를 못하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전전긍긍 끙끙댄다더니, 달씨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다니!
호주에서 아프면 생기는 일
달씨는 참다 참다 발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러려면 엑스레이나 MRI 같은 것을 해야 했다.
호주에서 발 상태가 어떤지 알기 위해 그녀가 겪은 프로세스들이다.
1. GP (general practitioner)를 예약한다.
GP는 포괄적인 검진과 진단을 위해 만나는 첫 번째 의사이다. 예약하려면 최소 일주일 걸린다. 달씨는 3개의 메디컬 센터 예약시스템을 열고 가장 빠른 예약시간이 가능한 의사를 선택해 예약한다.
2. GP를 만난다. 대기실에 있다 의사가 환자를 부르러 온다.
달씨가 절뚝거리며 따라가자 다행히 발목에 이상이 있는지 눈치챈 의사, "발이 불편하세요?".
지난 한 달간 새벽 장거리 달리기 대회를 2회, 그로 인해 부상을 달씨가 이실직고했다. 문제는 열흘 뒤 마라톤이 있고 (그렇다, 달씨는 또 아무도 모르게 시드니 마라톤 3주 전에 연습용이라며 지역 마라톤을 등록해 놨다지..), 더 중요한 것은 그 3주 뒤에 시드니로 마라톤 하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가 차트의 환자 나이를 응시했다.
“지금 제대로 회복 안 하면 만성 질환으로 갑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그럼 다음 주 마라톤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큰 일 납니다. 9월 마라톤도 무리입니다. 일단 사진 찍고 다시 얘기합시다. 수영 같은 무리 없는 운동만 하시고요.” 의사는 단호히 말했다.
3. 엑스레이와 초음파 의뢰서를 받아 나왔다. 한국처럼 같은 병원, 같은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녀는 이미징 전문 센터에 또 연락하여 예약을 해야 했다.
4. 예약 날짜에 가서 엑스레이와 초음파를 찍는다.
5. 그럼 결과는? 결과는 GP에게 바로 가기에 다시 GP 만나는 시간을 예약한다.
6. 예약된 시간에 의사를 본다.
그는 초음파 결과 진단명을 말했다. “tibialis posterior tenosynovitis입니다.”
뭐라는 건지.. 집에 와서 자세히 찾아본다. 후경골근건초염. 한국 이름도 어렵다. 종아리부터 길게 발목뼈 아래로 들어가는 근육이 손상되어 염증이 생겼다 한다.
7) 물리치료사나 족치료사를 만나서 치료를 받으라 한다.
8) 치료사들 예약하려면 또 일주일
의사를 만나 정확한 병명을 알기까지 최소 1-2주가 걸리는 이 의료시스템, 달씨는 10년을 넘게 살아도 적응되지 않는 호주의 프로세스였다. 아프지도 다치지도 않는 게 상책이었다.
달리기 확증편향
이 부상을 계기로 달씨는 총 4명의 치료사를 만났다.
두 명은 "원래 후경골 근육은 오히려 가만히 두면 더 안 좋아지니 조금씩이라도 달리기를 하는 것이 좋아요."
다른 두 명은 “지금은 무조건 멈추어야 합니다.”
정확히 2:2였다. 인간은 확증편향이 있지 않은가.
달씨는 객관적이려 했으나, 결국 “달려도 괜찮다” 쪽에 끌리었다. 그런데 막상 조금 달리면 다시 통증이 말을 했다. “멈춰!”
그 중 발치료사 한 명은 달씨 아이의 족부 치료 때문에 한때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잘 지냈어요? 애들 셋 다 잘 지내고요?”
달씨는 치료사의 가족 이야기를 기억하며 안부를 물었다.
“네, 잘 지냈어요. 그 사이 아이는 넷이 되었고요.” 치료사는 허허 멋쩍어하며 웃었다.
본인도 마라토너이기에 달씨의 하프 마라톤 도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달씨의 부상 경과와 남은 일정을 들은 그는 말하였다.
“첫 번째 마라톤 도전은 꼭 해야죠. 제가 마라톤 전까지 최대한 테이핑과 연고 치료를 병행으로 도와드릴게요.”
다소 까다롭게 생긴 장신의 백인 치료사가 세상 다정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크로스트레이닝/교차 훈련
그리하여 달씨는 매주 한 번씩 물리치료사와 족부전문치료사를 오가야 했다.
달리기 말고 할 수 있는 운동을 챙겨보았다. 이른바 크로스 트레이닝.
오르막을 걸어 올랐다.
어느 정도 앉아서 할 수 있는 필라테스로 코어 근육을 단련코자 했다.
무리가 덜 하다는 자전거 타기를 했다.
아주 가끔 수영도 했다.
사실 필라테스는 익숙했다. 작년 하프 마라톤을 통해 ‘코어 근육’의 중요성을 몸소 느끼어 주 2회는 해왔다. 필라테스의 호흡법은 달리기에도 도움이 크게 되었다.
피트니스 센터 (Gym)에 가지 않더라도, 집에서 할 수 있는 스쾃/ 런지/ 플랭크 동작들만 제대로, 꾸준히 해도 근육 강화에는 꽤나 도움이 된다고들 했다.
그렇다고 달씨가 꼬박 그 동작들을 챙겨한 것은 아니다. 물리치료사가 알려준 동작들은 아픈 곳을 건드려 자꾸 안 하게 되었다.
마라톤 중계가 재밌을 줄
예전에는 질색이었던 마라톤 중계를 보고 있는 달씨, 요즘 그녀의 큰 변화들이 눈에 띄게 보였다. 마라톤 풀 영상을 찾아보며 혼자 짜릿해하거나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다.
달리기 관련 서적들을 읽어나갔다. 42.195Km를 해야 ‘마라토너’로 쳐준다는 사실, 그전까지는 하프 마라톤을 했어도 ‘러너’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엘리트 선수가 아닌 일반인이 풀코스를 완주한 사람들을 ‘masters’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직은 어색하고 부끄러운 단어 마스터스, 달씨도 될 수 있을까 넌지시 상상해 보기도 했다.
엘루이드 킵초게
알수록 재미있는 달리기 세계로 앉아서 여행 중인 달씨.
아이돌이나 연예인에 큰 관심이 없던 그녀가 최근 팔로잉한 사람이 생겼다.
세계 마라톤 신기록 보유자이자 세 자녀의 아빠인 케냐 마라토너, Eluid Kipchoge이다.
그는 2018년 세계 신기록을 낸 후, 2022년 베를린 마라톤에서 2:01:09로 자신의 기록을 경신했다. 그의 비공식 기록으로는 2019년 INEOS 페이스 챌린지에서 Sub 2, 무려 1시간 59분 40초 를 만들기도 했다. 인간의 한계를 깨버렸다.
이후 2023년 시카고 마라톤에서 20대 초반의 Kelvin Kiptum 선수가 (안타깝게도 켈빈 선수는 신기록을 만든 지 몇 달 만에 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Kipchoge의 기록을 깨고 2:00:35라는 인류 최고의 기록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킵초게는 GOAT, Greatest of All Time 라고 불리는 마라톤계의 전설적 선수이다.
달씨가 킵초게 선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세계 챔피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들과 말들에서 꾸밈없는 겸손함과 배려심이 새어 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레이스는 항상 ‘미소’ 엔딩이다.
속도는 포기한 늘보 러너, 달씨이지만, 그가 달리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왔다. 인간이 42.195Km를 1Km당 3분대 페이스(pace)로 달리는 것도 모자라, 결승선을 들어올 때 그토록 환하게 웃을 수 있다니! 색다른 울림이었다.
그가 40세가 되기 2달 전인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 비록 완주를 하지 못하고 처음으로 DNF(did not finish)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순간에도 응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매너 있는 태도로 인해 여전히 존경받는 마라토너이다.
그가 달리면 마음이 따듯해지고 모두가 축제가 된다.
생각해 보니 그 옛날 TV 마라톤 중계방송이 그토록 재미없던 이유는 그녀가 달리기 포비아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죽기 직전 사람들처럼 질리도록 힘들어하는 선수들의 표정만 봐도 "왜 저걸 하나.." 하는 부담감과 불편감이 있었나 보다.
부상 얻는/ 낫는 팁들
엘리우드 킵초게는 부상 방지를 위한 핵심으로 ‘꾸준함, 저강도, 회복’ 3가지를 강조했다.
오래 하는 훈련일수록 저강도로,
대신 빠짐없이 매일 훈련하기.
훈련 후 헬스 자전거로 관절에 부담을 줄이고 회복을 촉진한다고 했다.
또한 정기적 물리치료나 마사지를 통해 근력을 확인하고 신체 불균형 등을 미리 파악한다 했다.
대부분의 러너들은 근육이나 인대, 힘줄 관련하여 부상을 겪는다. 햄스트링, 족저근막염, 장경인대, 슬개건염, 연골연화, 거위발건염 등등.
달씨가 터득한 '부상 얻는' 팁들이다.
충분하지 않은 웜업과 쿨다운, 무리한 일정,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리 웨이트 운동까지. 평상시 근육 강화에 노력을 덜 하기도 했고, 적응되지 않은 카본 플레이트 운동화를 신은 채 장거리를 했다.
그녀가 달리기를 시작할 때 ‘부상 없는 달리기’를 추구한다고 떠벌렸건만, 돌아보니 최근 부상으로 가는 길을 착실히 밟아온 셈이다.
결국 의사의 진단은 정확했다. 과사용 (Overuse)로 인한 힘줄 미세파열과 염증 발생.
그래서 간다 vs 안 간다
시드니 마라톤이 2-3주 앞으로 다가왔다.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만만치 않은 42.195km 거리, 걷더라도 할 수 있을까?"
그녀는 계산해 보았다.
"이제 달리기 실력이 느는 속도 보다 몸이 낡는 속도가 더 빠르지 않을까."
이번에 회복을 기하며 다음을 기약하면 ‘다음’이 언제가 될지 모를 일이었다.
마라톤 후 부상이 심해져 회복을 하더라도,
지금이 회복하기 가장 젊을 때라 생각했다.
계산도 근거도 엉뚱한 달씨가 마음을 정했다.
“간다!”
출전 대신 응원
시드니 마라톤 전, 8월 말에 해보기로 한 애들레이드 마라톤.
그녀는 과감히 포기했다. 대신 그날 절룩이는 발을 이끌고 러너들을 응원하러 나섰다.
아는 사람 한 명 없지만, 누군가 응원이라도 해주고 싶어 했다.
결승선은 기다림과 환호로 술렁거렸다. 꽃다발을 들고 있는 연인, 환호와 허그로 달려오는 가족들, 박수 쳐주는 친구들에게 안기며 짧은 코스를 완주한 사람들이 속속 들어왔다.
드디어 풀코스 마라톤 1등 주자가 달려왔다. 20대 건장한 남자.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토했고 고통이 역력했다. 달씨는 아주 가까이에 있었기에 냄새까지 기억하게 되었다.
그토록 힘겨운 여정을 끝낸 러너들.
그럼에도 분명 다음 마라톤을 준비하고 달릴 마라토너들.
달씨의 마음속 물음은 더 짙어졌다.
"사람들은 왜 달릴까, 왜 마라톤을 할까.
아마도 해 본 사람만 알겠지?"
"Only the disciplined ones in life are free." — Eliud Kipcho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