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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번째 관찰: 브라보 마라톤! 브라보 혼행!

엄마 아닌 러너로, 3박 4일 '나'로 지내기

by 경쾌늘보


최후의 처치


“시드니행 비행기 몇 시라고 했죠?”

“오후 12시 반이요.”

“그럼 공항 가는 길에 꼭 들러서 테이핑 받고 가세요.”


족부치료사(Podiatrist) 당부대로 달씨는 마지막 테이핑을 받고 가기 위해 분주한 오전을 보냈다. 도시락을 싸고,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몇 가지 음식을 해놓고, 강아지 산책을 시켜놓고, 캐리어를 끌고 치료사에게 갔다.

기다렸다는 듯 그는 마라톤 당일까지 버틸 수 있게, 꼼꼼히 테이핑을 했다.

“되도록이면 물이 닿지 않게 하세요.”

본인은 어린 아기 때문에 당분간 마라톤이 어려울 것 같은데 내가 하는 것을 보니 신난다며 행운을 빌어줬다.

달씨의 발은 겹겹 단단한 테이프로 쌓여 두꺼운 덧신을 하나 더 신은 느낌이었다.

"발아, 제발 잘 버티어줘", 하며 공항으로 향했다.



엄마 Off, 러너 On


엄마모드 끄고, 러너모드만 ON!

작년 시드니 하프 마라톤 때는 남편과 아이들 함께 갔다. 그러나 이번 시드니행은 다들 바쁜 시기여서 매우 ‘안타깝게도’ 혼자 가게 되었다.

비행기가 하늘로 오르며, 달씨의 입꼬리도 따라 올랐다.


“아싸! 엄마로서 산 시간 동안 여태 혼자여행은 꿈도 못 꿨던 일인데, 3박 4일 혼행이라니. 브라보! 혼행, 브라보! 마라톤”.

국외는 아니지만 시드니, 게다가 마라톤으로 보게 될 하와이 K와의 만남도 코앞이기에 마음이 벌써 콩닥거렸다.


마라톤? 발 통증? 알 수 없는 앞날이었지만, 혼자 있는 며칠은 꽉 채워 즐겨보기로 했다.




헬로 어게인, 시드니!


비행기 창문 아래로 시드니 전경이 보였다. 강줄기들을 따라 예쁘게 조성되어 있는 공원들과 마을들, 바다 쪽으로 갈수록 떠다니는 배들과 하얀 조각, 오페라 하우스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시드니 땅에 가까이 가고 있어.


시드니 마라톤 엑스포


24년도의 시드니 마라톤은, 세계 7대 메이저 마라톤으로 선정되기 위해 전 해보다 열과 성의를 다했다. 우선 코스 조정도 있었지만 가장 큰 변화는 엑스포의 위치 변화였다. 공항 근처 어느 구석에 있던 작년과 달리 마라톤 엑스포가 시티 정중앙의 컨벤션센터로 옮겨진 것만 봐도 뭔가 메이저 가능성에 가깝기 위해 투자를 많이 한 듯 보였다.


배번(bib) 수령을 위해 호텔에 가기 앞서 시드니 마라톤 엑스포에 들렀다. 여전히 살짝 절룩거리는 다리로 기차를 갈아타고 엑스포를 가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 염증이 있으면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피로함을 느끼는터라, 과연 할 수 있을까 달씨의 의구심이 따라다닌다.


42.195Km, 풀코스 배번 줄에 서있는 달씨. 크게 프린트되어 있는 코스 맵을 보며

"정말 여기까지 왔구나, 세상 느림보가 이틀 뒤면 그 길에 있겠구나"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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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번 받으로 '마라톤' 줄로, 그리고 손에 쥐어진 Finisher 티셔츠



완주 티셔츠 손에 들고 고민


메달은 모든 코스 완주자들이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작년 달씨가 못 받았던, 풀코스 완주자에게만 주는 ‘Finisher’ 셔츠는 받고 싶었다. 그런데 마라톤 부스에서 미리 완주 티셔츠를 주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무슨 일인가. 시작도 전에 완주자 셔츠를 손에 쥔 달씨, 잠시 유혹에 동공이 흔들린다.

"연습도 많이 못했지, 발도 아프고, 그런데 완주자 티셔츠는 이미 내 손에.. 쉴까?"

웃음 반, 동요 반 완주 티셔츠 앞에 흔들리는 마음, 무슨 생각이야 달씨! 스스로에게 핀잔을 주고 마음을 정리했다.



나홀로호텔


작년 나이트클럽 옆 호텔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는 좀 더 조용하고 결승선 근처의 호텔로 예약했다. 그리고 혼자 머물 숙소라 깨끗하고 안전한 지역으로. Pitt St. 에 있는 호텔에 도착하니, 작년의 악몽이 떠올랐다. 호텔 앞 광장은 퇴근 후 직장인들의 불타는 금요일 성지 같았다.


체크인하면 가장 조용한 방향과 방으로 부탁했다.

키를 받아 들어간 호텔룸, 하얀 침구와 깔끔한 욕실, 진정 4일간 달씨의 천국이 될 곳이었다.


“엄마, 양말 어딨지?", "여보, 저녁 뭐 먹지?”, "얘들아 폰 좀 그만 볼래?" 등등 질문도 잔소리도 없을, 이 순간만큼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하와이 K 조우


짐을 푸니 벌써 저녁이었다. 그날은 멀리서 온 하와이 K와 워밍업으로 해변 달리기를 할 계획이었지만, 너무 늦어 호텔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다른 호텔에 머무는 K는 한걸음에 와주었다. 19년 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그동안 연락을 주고받은지라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앉자마자 마라톤 얘기를 시작했다. 수년차 마라토너답게 마라톤 열정이 살아있음이 느껴졌다.


다음 날의 각자 일정이나 마라톤 당일 계획 등을 나누고 헤어진 후 달씨는 스르르 눈이 감겼다.



좋은 아침, 시드니!

내일을 준비하는 러너들

D-1, 하루 남았다.

달씨의 아침은 달콤했다. 혼자 조식을 먹고, 이른 아침 러닝화를 신고 시드니 아침 공기와 풍경을 마주하러 나갔다.


써큘러 키(Circular Quay) 주변에는 이미 러닝 크루들이 가득했다. 약간의 긴장감 또 약간의 여유가 바닷바람에 섞여 닿았다. 그녀는 시계방향으로 보태닉 가든과 아트 갤러리, 주립 도서관을 크게 돌며 시드니의 아침을 만끽했다.









NSW 아트 갤러리는 못 참지


아침의 여유 후, 시드니에 사는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는 달씨에게 NSW 아트 갤러리 (New South Wales Art Gallery) 만큼 좋은 곳이 없다.


약속 장소로 가는 중 딸에게 전화가 왔다. 다음 주 캠프 준비물을 사달라고 한다. 달씨는 준비물을 사기 위해 시드니 시내를 돌아다녔다.

“이제 이틀은 정말 엄마모드 OFF!”.


점심 먹기로 한 만남은 확장한 옆 갤러리와 보태닉 가든의 봄까지 누리느라 어느새 저녁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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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Gallery of NSW, 앞마당과 내려다 본 전망


저녁이 되니 발이 더 불편했고, 친구가 내일 마라톤 할 수 있겠냐고 걱정하며 중요한 정보를 주었다. 진통제, 시드니에서 처방 없이 살 수 있는 가장 센 약을 샀다. ‘이 알약으로 내일을 버텨보자!’


마라톤 전날은 ‘카본 로딩’, 즉 탄수화물을 든든히 섭취해줘야 했기에 달씨는 마음 놓고 피자와 파스타로 배를 잔뜩 채우고 숙소로 들어왔다.



마라톤 불면증


마라톤 용품들을 다 챙기고 레디샷도 찍어 K와 공유하는 평범한 마라톤 전날 밤이었다. 내일 거사를 위해 일찍 푹 자자. 알람을 맞추고 암막커튼을 내리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긴장한 걸까? 걱정한 걸까?


말똥한 그녀, 내일 새벽에 하려 했던 것을 미리 했다. 비닐봉지로 테이핑 발을 싸매고 따스한 샤워를 했다. 다음 대책으로 챙겨간 <폴 오스틴> 책을 읽었다. 그 밤 책을 읽는다면 눈도 몸도 거부하겠지 했으나 한 시간이나 읽었는데 아직도 깨어있었다.


'마라톤 전날 불면증 (Pre-marathon Insomnia)'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몸이 경기를 대비하는 자세라고 한다. 아드레날린 러시가 이미 일어나 잠을 못 자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


달씨, 그렇게 2시간여 침대에 누워있다 일어났다.


날이 밝았다.


생애 첫 마라톤 날이.

꽁꽁 테이핑 잘 버텨주길! 발 아프고
잠 못 자고.. 이런 것이 마라톤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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