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너인 듯 러너 아닌 러너 같은 연습
서서히 멀리
가을이 진해진 6월 초겨울, 달씨의 달리기는 미미하지만 늘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 여유로운 ‘라르고’ 속도였다. 초보라 가이드가 필요할 것 같 동네 러닝 클럽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비가 와도 우박이 와도 무조건 아침 6시 칼시작"이란 문구에서 어쩐지 기가 죽었다. 베테랑 러너들의 분위기가 느껴져 번데기처럼 쪼그라든 마음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다고 주변에 아무리 찾아봐도 달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혼자만의 속도로 계속 달렸다. 천천히.
21Km를 달리기가 어떻게 가능할까에 온통 몰두했던 그 무렵에 그녀는 21이라는 숫자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차 계기판 온도 21에도, 달력의 숫자 21, 속도 21!
집착인가 강박인 것인가.
독고 러너
혼자의 달리기는 인터넷과 책들로부터의 정보를 적용해 보며 호흡은 어떻게 하는지, 스트라이드는 어떤 것이 맞는지, 달리기 앱은 어떤 것이 좋을지, 달릴 때 이어폰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 무엇을 듣는지, 트랙은 어느 방향으로 도는지조차 스스로에게 맞는 것을 터득하며 하나씩 찾아나가는 여정이 되었다.
초보인 달씨의 뇌는 달릴 때 몇 가지 문장만 반복했다.
"아 힘들어!", "왜 이리 안 늘지?", "얼마나 더 달릴 수 있을까?"
온통 힘듦에 집중되었다. 이런 생각들을 밀어내고 다른 것에 집중하려고 가요, 팝송, 뉴스, 강의 혹은 책 등 다양한 것들을 시도했다.
하루키처럼 못하지만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향과 음성을 들으며 달리며 그녀는 다른 사람들은 달릴 때 무슨 생각을 하고 무얼 듣는지 사뭇 궁금했다. 러너들에게 회자되는 책,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를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영어였기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어 효과가 있었는지 그날 처음으로 5Km를 쉬지 않고 달렸다. 놀라운 진보에 입꼬리가 실룩실룩 거린다. 뭔가 한고비를 넘은 듯한 그녀의 표정은 불과 얼마 전 고군분투했던 처음에 비해 여유 있어 보였다.
하루키 책에서 인상적인 것은 저자 하루키는 달리기가 좋아서 한다기보다는 ‘잘’해서 한다는 것이었다. 달리기를 '잘'해서 하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는 인생이었기에 그저 놀라웠다. 그리고 또 한 문장에서 귀를 의심했다. 대회에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다’라는 문장이다. 순간 뛰다-걷다를 반복하고 있는 러너인 듯, 러너 아닌, 러너 같은 존재는 도로의 민폐일까 생각이 들었다.
새로 시작한 달리기에서 생각지 못한 우월 그룹에 대한 존재감을 느끼니 잠시 초라해졌다. 하지만 시간으로 보면 분명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목표인 완주로 보면 결승선을 들어가는 자는 빠른 자든 느린 자든 동일 선 상에 있는 완주자라고 생각하며 가던 길을 계속 가기로 했다.
러너스 하이라는 매직
5Km라는 고비를 넘은 달씨가 이제 하프 마라톤을 100일 앞둔 날, ‘1시간 달리기’ 목표를 이벤트로 혼자 정해보았다. 그녀는 이벤트를 좋아하는가 보다. 가족들 저녁을 챙기고 설거지를 하고, 저녁 어두워진 거리로 나갔다. 온라인에서 달리기 하는 사람들의 조언을 보니 초보가 연습할 때는 거리를 늘려가기보다 시간을 늘려가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1시간을 달려본 적은 없어서 확신이 없었다.
30분 그리고 40분이 지나 조금만 더 버티자 하던 그녀가 어느 순간 신기하게 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달리기가 아닌걸!
달씨의 몸은 가벼워 보였고 그야말로 편하게 달리고 있었다. 더 신기한 것은 표정이다. 죽을 만큼 힘들다는 인상이 가득한 여느 날의 표정이 아니다. 마치 한국까지라도 달릴 수 있을 태세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호등과 내일의 일정에 대한 부담감이 그녀의 다리를 멈췄다. 땀에 범벅된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것은 땀방울이라기보다 환희의 방울 같았다. 차가운 저녁 공기 속으로 나오는 입김은 즐거움이 뿜어져 나와 공기를 채웠다.
뇌에서 자체적으로 분비되는 엔도르핀 생성과 같은 원리로, 30분 이상 달리기를 하다 더 이상 할 수 없는 힘든 지점을 넘겼을 때 통증이나 불안을 경감시키고 즐거움과 진통 효과를 준다고 알려진 그 러너스 하이! 풍문으로만 들은! 러너들의 로망, 러너스 하이를 만난 것이다. 산타 할아버지가 착한 아이가 선물 주듯, 뇌가 착한 다리에게 주는 선물 같았다. 뇌와 다리가 더 이상의 접점이 없을 듯한 기분과 체력으로 계속 달리고팠다.
러너스 하이는 그녀의 달리기를 어디로 데려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