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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시작

'달씨'라는 여자

by 경쾌늘보
달리기 제로에서 대뜸 하프 마라톤?

| 달씨라는 여자



호주 남쪽 애들레이드에 서서히 습한 찬바람이 불기시작하는 4월 어느 날, 한 중년 여성과 카페에서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달씨'. 작지 않은 키와 체구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어찌 보면 빈틈없어 보일 것 같은 그녀는 한참을 망설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라테아트가 예쁘게 담긴 잔의 커피가 사라질 때쯤 그녀의 이야기는 끝났다. 얘기를 들으며 내내 지켜보던 나는 그녀의 고민이 꽤나 비현실적이고 엉뚱하다 싶어 관심 있게 이 일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나 혹시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이야기가 약간의 용기와 동기가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관찰노트를 기록한다.




| 달씨의 고민


그녀는 그 도시에서 살아온 지 10년이 훨씬 넘었고, 호주에 다른 가족은 없으며 10대인 두 자녀의 엄마다. 여느 엄마처럼 아이들의 등하교 픽업과 기타 활동들을 라이딩해주고, 남편이 운영하는 작은 비즈니스의 사무일을 하고, 시간은 비교적 유동적이게 사용하는 편으로 보인다. 낮 시간은 장 보기, 집안일로 꽉 차지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종종 친구들과의 커피타임을 즐긴다. 이따끔 여행 가는 것을 인생 최고의 낙으로 여기고, 산책이 그녀의 유일하고 만족하는 취미생활로 보인다.


그런 달씨의 고민은 이러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소원, 일명 버킷리스트 중 하나, 바로 하프 마라톤 완주이다.


평소 달리는 모습을 본 적 없는 것 같아 의아했다. 나는 그녀에게 평소 달리기를 하는지, 얼마나 가끔 하는지 물었다. 대답하기 난감해하며 본인은 7살 이후로 달리기를 해본 일이 없다 한다.




| 달리기 포비아 발생 일


그 날의 일을 말했다. 8명 정도가 모래 운동장 위에 하얗게 그려진 출발선에 대기하고 있고, 총성 소리가 '탕' 짧게 울리면 앞으로 뛰어나가라고 선생님이 말했다. 또래보다 2년 학교를 일찍 시작하여 햇병아리들 중 햇병아리 같은 작은 체구의 그녀는 출발 소리를 듣고 다른 아이들과 같이 움직였다. 옆의 아이들이 뛰는 것을 두리번두리번 보기도 했으나, 빨리 달려야지 하는 생각은 없었다 한다.


다음 출발자들을 위한 총성이 한 번 더 울렸고 그들 중 몇 명이 그녀 앞을 가로지른 후에야 멈춰야 하는 선에 들어왔다고. 왕년에 달리기 좀 했다 하는 그녀의 엄마는 그녀를 안쓰러워하기도, 부끄러워하기도 하는 눈치였다 한다. 그녀는 달리기 꼴찌로 놀림받은 기억 때문인지 달리기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달리기 포비아라고 후에 혼자 진단해버릴 정도로 그녀는 달리기가 무서웠다. 학창시절에도 오래 달리기는 무슨 이유와 핑계로든 참석하지 않았다 한다. 달린다는 것은 해도 안 되는 것, 마주치고 싶지 않은 분야였다는 것이다.


비가 와도 버스를 놓쳐도 달리기 제로인 그녀의 소신을 잘도 지키며 살아왔다 한다.

그것도 소신인가 싶지만.




| 하프 마라톤?


“그런데 왜 갑자기 하프 마라톤?”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본인과는 무관한 일이기에 늘 무심히 지나가는 편이었는데, 매일 산책길에서 내리막을 내려올때 오르막을 뛰어 올라가는 여자를 오랫동안 지켜보게 되었다.


안젤리나 입술을 가지고 있고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던 한 러너. 날씨가 좋아도 비가 와도 매일 언덕코스를 2바퀴씩 뛰는 그 여자 러너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한다. 자유함과 단단함을 느꼈고 ‘나도 달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달리기를 생각하게 한 또다른 러너가 더 있었다 한다. 딸아이의 학교 운동회에 가면 늘 일등하는 멋진 소녀가 있는데 전학년에서 키가 가장 작은 왜소한 친구였다고.

'난 작아서 못달렸어. 어려서 못달렸어.' 자신이 달리기 못하는 이유의 방패막을 내밀었던 것이 떠올랐고, 어쩌면 핑계였을 뿐이다 생각이 들었다고.


위로 날아가지도 못하고 땅에 딱 붙어 있지도 못하는 바람이 반쯤 빠진 풍선 같은 그녀의 이민 삶에 하나의 도전을 해보고 싶었고, 그 대상은 한 번도 시도할 생각도 없던 ‘오래 달리기’였다.



| 더구나 시드니?


급기야 그녀는 고심 끝에 며칠 전 시드니 마라톤을 신청해버렸다고 한다. 사람이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이러한 무모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하긴 그녀는 무모한 도전을 좋아해 보인다. 그러니 멀고 먼 호주 이름도 낯선 애들레이드에서 살고 있나 싶기도 하다.


5Km도 아니고 21Km 달리기는 보통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을 때 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게 상식 아니던가. 그것도 본인이 사는 곳도 아닌 시드니에서?




| 엉뚱함의 끝


첫인상과 달리 매우 빈틈 많아 보이는 고민으로 들렸다.

달리기를 전혀 안 하며 살아온 중년 여성의 하프 마라톤 완주라는 것이 말처럼 쉽게, 아니 원한다고 가능할까?

말리고 싶었다.

간극이 너무 커보였다.

그 나이에 무모한 도전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한편으로 나도 궁금했다.


그 엉뚱함의 끝은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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