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알수록

더 사랑하게 되었다

by 서하

살면서 수많은 존재들을 만나 왔지만, 알면 알수록 나의 사랑이 깊어지는 경험을 한 경우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서로에 대해 점점 알아갈수록, 본바탕에 가까워질수록 예상치 못한 가시에 찔려 사랑을 포기하게 된 경우도 있었고, 껍질을 깔수록 드러나는 속살이 매력없게 느껴져서 사랑이 시들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알면 알수록 그 깊이에 빠져들고, 향기에 취하고,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존재를 만나게 되기란 신의 축복이 없으면 불가능한 경지가 아닐까. 감사하게도 나에게 그런 존재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커피다.


마드리드에서 교환학생을 할때 스페인 사람들의 에스프레소 사랑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진한 커피의 쌉싸리한 맛을 음미하기에는 깊이가 부족했다. 입술에 닿자마자 직관적인 달콤함을 뿜어내는 음료들만 좋아했기에, 카페모카나 시나몬 카푸치노를 주로 마셨다.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맛보면서 입맛도 어른으로 자란건지, 20대 중반을 지나면서 점점 쌉싸리한 본연의 커피 맛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카페를 창업하게 되면서 커피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이제는 아메리카노나 드립커피 없이는 하루의 일과표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한 허전함까지 느끼는 지경이 되었다. 이정도면 사랑에서 중독으로 넘어간 것인가. 하지만 절제의 미학을 알기에, 하루에 한잔, 아침을 깨우는 향긋한 커피 한잔으로 만족하고 있다.


커피는 꺼려지는 출근길을 설레게 만들어주는 마법을 부리는데, 회사를 다닐때는 바빠서 화장을 포기하더라도 반드시 드립 커피를 내려갔다. 갓 분쇄한 원두의 향기를 맡고, 한방울씩 떨어지는 커피를 보며 사회에서 써야하는 에너지를 차분히 정비했다. 갓 내린 커피를 담은 텀블러를 따릉이 바구니에 싣고 힘차게 패달을 밟았다. 곧 사무실에서 마시게 될 드립 커피를 상상하니 힘이 났기 때문이다. 내 자리에 도착해서 텀블러를 열고 열기를 식히고 있으면, 출근하는 사람들이 커피 향 좋다는 말을 하며 지나갔다. 향으로, 맛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커피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퇴사를 한 지금은 내 사랑 커피가 주인공인 장소로 출근을 하니 한층 더 설렌다. 제일 좋아하는 우리 카페의 아메리카노를 곧 맛본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달려간다. 카페에 도착하면 곧 초를 셋팅하고 에스프레소를 추출한다. 그날의 날씨와 습도에 맞는 추출 시간과 원두 양을 설정하는 순간은 그날의 가장 밀도있는 시간이 된다. 신선한 원두에서 나온 크레마를 보면 마음이 웅장해진다. 고소하면서도 깔끔한 아메리카노와 함께하는 하루의 시작은 한층 가볍다.


커피 사랑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날씨가 좋아 급 야외에 돗자리를 펴고 해를 쬐로 가더라도 대충이라도 커피를 내릴 도구를 챙겨간다. 부족한 도구를 탓하랴, 진정한 고수는 아무 탓도 하지 않는법! 한번은 가족 여행을 갔는데 맛있는 원두랑 드립퍼는 다 챙겨와놓고 원두 그라인더를 안챙겨간 거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다가 마침 숙소에 있는 절구를 발견했다. 절구에 원두를 넣고 칼 손잡이 뒷면으로 원두를 열심히 아작내던 아빠를 보며 웃음이 터졌던 추억도 떠오른다.


아침에 몸이 찌뿌둥해서 침대에서 한발짝도 움직이기 싫은 날, 밍기적 게으름을 피우다가도 커피 마신다는 생각을 하면 몸을 벌떡 일으키게 된다. 나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도 하고, 숨 고를 시간을 주기도 하고, 흐릿한 정신을 깨워주기도 하는 여러모로 고마운 커피.

비 오는 경주, 먹구름 낀 하늘과 한옥 지붕을 보면서 마시는 한잔의 커피가 그 무엇보다 큰 위로로 다가오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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