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하길 천만다행

제주 렌트카 사고

by 서하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일주일간 나홀로 제주여행을 떠났다.

여행이라면 도가 텄을 정도로 숱하게 떠났다 돌아오는 방랑생활을 했지만, 이번 여행처럼 마음이 홀가분하고 평화로운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몸은 자유로웠을 지라도 마음은 햇빛한줄기 비추지 않는 심해에 가라앉아있었던 고통의 나날들을 지나오면서 버텨내기 위해 떠났던 여행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일테다. 이제는 내 상황이 좋아진건지 아니면 내 마음이 해방된건지 무엇이 변했다고 단정지어 말할순 없지만 확실히 편안하고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매일 아침 산방산 아래 구옥을 개조한 요가원에서 요가를 하고 동네 다방에서 커피와 빵을 먹고, 뚜렷한 목적지 없이 드라이브를 하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에서 책을 읽는 여유와 즉흥이 더할나위 없이 좋아서 제주에 있는 동안의 루틴이 되었다. 나의 여행 스타일은 가고 싶은 카페나 맛집을 몇개만 찾아두고 일정을 정해두지는 않는거다. 그날 아침의 기분에 따라 움직일 거리와 지역을 택한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볼거리 한두개를 정하고 맛집과 카페를 고른다. 여행에서는 쫓기듯 움직이고 싶지 않거든. 일상에서 시간맞춰 해내야하는 것들이 많은데 여행은 쉼과 여유를 뜻하니, 쉴때 만큼은 내 속도를 존중해주기로 했다.

개냥이가 함께해주는 더블 힐링 요가

신기하게도 제주에서는 최소 하루 네끼는 먹었다. 평소에 하루 두끼를 먹고 그마저도 대충 떼우기 일쑤였는데, 여유가 생기니 입맛이 돌았다. 점심은 카페에서 서서 대충 떼우고 저녁은 수업 사이에 급히 먹다보니, 먹고잡이였던 나도 자연히 생활패턴에 맞춰 식욕이 줄었다. 그런데 여행오자 마자, 마음을 편히 가지자 마자 숨겨져있던 원래 내 식욕이 돌아왔다. 역시 일체유심조. 그동안 굶주렸으니 마음놓고 먹는 즐거움을 즐겼다.

보말칼국수, 돔배고기, 갈치구이, 해물라면, 전복설렁탕 등등 제주의 묘미 중 하나는 관광지인 만큼 맛집이 즐비하다는 것, 식도락 여행을 하기 딱 좋은 지역이다.


2025년의 마지막 날은 에가톳라이브러리 라는 북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성량 좋은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잔잔한 음악과 향긋한 보이차, 그리고 통창으로 보이는 자연의 조합이 완벽했다.



카페에서 나오니 25년의 마지막 해가 저물고 있었다. 2025년은 내가 이렇게나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된 한 해였고, 인생은 오롯이 혼자라는 뼛속까지 시린 고독을 부여잡고버틴 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기특한 건 감사함은 잃지 않았다는 거다. 정말 힘들었지만 이정도인게 어디냐, 최악은 아니니까 감사하다는 생각은 늘 함께했다.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다 보니 한 해의 끝에 닿았다. 막상 한 해가 끝나니 시원섭섭했다. 연말은 항상 이런 복잡미묘한 기분이지. 잘 가라 2025년, 그리고 2026년은 변함없이 감사함이 충만한 한 해가 되어주고 조금은 덜 외로운 한 해가 되어주렴.




다음날 새해 일출을 보겠다고 호기롭게 다짐했건만 늦잠을 자버렸다. 호다닥 준비하고 호스텔에서 주는 아침을 먹고 포도뮤지엄이라는 곳에서 하는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 이라는 전시를 보러갔다. 제목만 보고 찾아간건데 근래에 본 전시중에 최고였다. 내가 늘 생각하는 주제, 나라는 작은 인간. 우주에서 먼지도 안되는 크기로 찰나의 순간을 사는 우리지만 그래서 인생은 무의미 하다고 해도 스스로에겐 한번뿐인 얼마나 특별한 기회인지에 대해 늘 생각한다.

마음에 울림을 주는 전시도 보고, 이때까지는 모든게 좋았다. 제주의 두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주는 급변하는 날씨를 가진 곳이었다. 전날까지는 분명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해서 초봄같다고 생각했는데 다음날부터는 우박같은 눈발이 떨어지며 시베리아급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나는 눈을 경험해본적도 많이 없고, 더군다나 눈이 온 도로를 운전해본적이 없으니 눈길 운전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지를 몰랐다. 그러니 폭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점심을 먹기위해 1시간이나 떨어진 섬 반대편에 있는 음식점으로 향한 거였다.

한 절반쯤 갔을까, 구간단속구간 80km 제한이 있는 도로였는데 눈이 많이 오니 다들 서행을 하고 있었다. 차들도 많았고 나도 앞차를 따라 가다가 브레이크를 살짝 밟았는데 갑자기 확 미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브레이크를 밟는데도 차는 속도가 줄지 않고 오히려 미끌리며 더 빠르게 앞으로 나가는 거다. 앞차를 바로 박을거같아서 옆차선으로 틀었는데 옆차선에서도 미끌리며 빠른 속도로 앞차를 박을거같아서 다시 갓길로 틀었다. 이건 모두 7-8초 사이에 벌어진일이었다. 결국 내 차는 갓길에 있는 화단과 표지판을 들이박고 180도로 회전하며 갓길에 멈췃섰다.

차가 빠른 속도로 미끌어질때는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들었는데 충돌한 후 차가 멈추자 머리가 멍해졌다. 무슨일이 일어난건지 인지하고 받아들이는데까지 버퍼링이 걸린 기분이었다. 내 몸이 온전함을 확인하고 렌트카 고객센터에 신고하고 직원의 지시대로 사진 찍고 기다리고... 견인차가 올때까지 폭설로 사고가 많아서 거의 1시간을 기다렸다. 보험도 완전 모든게 커버되는 보험을 안들고 고급자차인가 두번째 거를 선택했던 기억이 있어서 찾아보니 500만원 한도까지만 보험이 된단다. 렌트카 직원은 내가 보내준 사진을 보더니 최소 900 정도는 견적이 나올거라며 겁을 줘서 사고가 난것도 놀란데다 가격까지 놀라워서 어벙벙한 상태로 견인차가 오길 기다렸다. 차로 이동할 생각이라 옷도 많이 안입고 나왔는데 제주의 눈바람이 너무 추워서 밖에 서있을때는 어찌나 온몸이 떨리던지. 박살난 차를 견인해서 ​자동차 정비소에 도착하니 정비사 아저씨가 엔진은 괜찮은거 같으니 너무 걱정안해도 된다고 다치지 않았으면 된거라고 안심시켜 주셔서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다.

제주도에서는 렌트카 차사고가 워낙 많고, 사고가 났다하면 몇백만원을 운전자가 부담하는건 예사라고 한다. 무조건 100프로 완전 보험을 드는건 필수고 전기차도 부품이 비싸니 되도록이면 가장 일반적인 아반떼나 K5 정도를 추천한다. 몇시간 기다리자 수리비 견적이 나왔는데 처음에 렌트카 직원이 엄포한 가격보다는 적게 나왔더라. 근데 영업손실비며 견인비, 휠비, 바퀴비 등등 보험처리가 안되는 부분이 너무 많았고 개당 가격도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그래도 직원이 어느 정도 딜을 해줘서 처음 나온 견적보다는 낮은 비용을 결제하고 나왔지만 영 찝찝한건 어쩔수 없었다. 분명 떼먹는 부분이 있을테니 따지고 들고 싶지만, 갑작스런 사고를 겪고 놀란터라 더이상 파고들지 싶지 않았고 그만 돈으로 떼우고 싶었다. 결국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가장 쉬운 일이라는 말에 동의하니까. 누구도 안다친게 어디야, 멀쩡한 것만으로도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다 싶고 부처님,조상님, 하나님 중 누가 되었든 분명 누군가 나를 도왔고 그 보살핌에 그저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찰나라고 하던데 사고도 찰나였다.

단 몇초안에 모든게 뒤바뀌는 느낌을 제대로 경험해보니 오만과 자만이 사라진다.

거대한 흐름 속에서 먼지같은 존재로 짧고 유한한 시간을 보내는 우리, 그저 묵묵히 오늘 행복하고 사랑해야지.

알면 알수록, 겪으면 겪을수록 그 수 밖에 없다. 지금 당장 '행복','사랑', 그 외에 다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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