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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9. 당신의 약함이 자랑이 되었기에

가장 약한 것으로부터 강하여지는 날들, 금산

by 슬로우소소

밤사이 많은 비가 내렸어요. 강풍이 불어 옷을 단단히 여며야 했습니다. 아빠는 할머니에게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말했어요. 꽤 시끌벅적한 아침이었습니다.


"엄마, 춥다니까. 이렇게 입으면 안 돼- 오늘 택시 타고 와야 하잖아."

"알았어. 알았다니까."

"더 껴입어. 오다가 추우면 어떡하려고."

"아유, 진짜 왜 이래. 알았다니까."


연재를 핑계로 아빠에게 여행을 제안했습니다. 처음을 함께했으니, 마지막 에피소드도 함께하자는 의미를 넣으면서요. 목적지는 금산이에요. 한 시간 정도가 걸리니 그리 먼 길은 아니었지요.




"어? 왜 이 길로 안내하지?"


내비게이션이 틀린 길로 안내하지는 않겠지만, 아는 길과는 달라 망설였습니다. 초행길로 갈지, 익숙한 길로 갈지 막바지에 다다라서도 갈등하는 아빠입니다. 가끔 이런 모습을 보면 꼭 저 같았어요. 제가 아빠를 닮았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까요. 이런 순간은 꽤 많습니다.


뭐 먹고 싶냐고 질문 하면 아빠는 꼭 되물어보고는 했어요. 항상 제가 더 먹고 싶은 걸 먹기 위해 표정을 살폈지요.


누군가에게서 안 좋은 부분이 보이면 사실 자기와 비슷한 부분인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가끔 눈치 보는 아빠를 보면 속상해서 되레 화가 나요. 그러다가도, 때로 제 모습에서 아빠를 봅니다. 아빠와 닮아있는 저를 발견해요.


그런 때는 말을 하다가 멈칫합니다. 이 대사, 이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차리고 나면 기분이 묘해져요.



차 안에만 있다가 내려보니, 바람이 더 강하게 느껴졌어요. 이에 맞서 흔들리는 모든 것들이 거센소리를 냅니다. 나뭇잎 하나만 보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데, 여린 잎이 모여 셀 수 없이 커다란 나무를 이루니 무엇보다 강해졌습니다.


강풍주의보에도 식당은 만석이었어요. 구수한 청국장 냄새가 퍼지고 이내 한 상 가득 채워졌지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수육입니다. 판판한 상추 위에 고기 두 점을 깔고 새우젓을 얹어 무말랭이를 곁들입니다. 또 넣을 게 없을지 살펴보며 이것저것 추가하다 보면, 한입에 먹기에 조금은 벅찬 크기가 돼요. 그렇게 싼 '쌈'에는 정성과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아빠에게 이런 쌈을 싸준 적이 있던가요. 퉁명스럽게 쌈 하나를 건네니 그대로 받아먹는 아빠입니다.


"아유. 그래도 확실히 세월이 빠르네. 네가 다 커서 이런데도 데려와주고."

"그치- 나밖에 없지?"


사실 아직 다 큰 건 모르겠습니다. 언제쯤이면 어른에 가까워질지, 모르는 것투성이예요. 그래도 이런 말이 듣기 좋습니다. 입꼬리를 올리며 푼수같이 인정하는 저예요.



다시 차를 타고 30분 정도를 달려갔습니다. 회색빛이었던 하늘이 점차 옅어집니다. 선명한 파란색이 짙어질 때쯤 솜사탕처럼 하얀 구름이 나타났어요.


"이야, 벚꽃 봐라- 벚꽃."


만개한 벚꽃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은은한 핑크색 잎이 살랑살랑 춤을 추고 있어요. 자신을 배경으로 사진 찍고 있는 사람들을 봤나 봅니다. 그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걸 보니 기쁜 거지요.



마침내 금산 금빛 시장에 도착했어요. 빨간 국제회관 간판이 보이면 딱 맞게 찾아온 겁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오래된 문이 하나 있습니다. 따듯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이곳은 바로 '두루미 책방' 이예요.

안쪽으로 들어가면 3개의 방이 나옵니다. 아늑한 첫 번째 공간이 맘에 드는지, 아빠는 곧장 신발을 벗고 들어갔어요. 소파에서 한번, 스탠드 옆에서 또 한 번-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 아빠를 카메라 안에 담습니다. 그러다 보면 금세 주문한 음료가 나와요.


방 곳곳을 살펴보니 여러 흔적이 묻어있습니다. 책장 구석에 작은 유리병과 메모지, 볼펜이 놓여 있었어요. 추천하고 싶은 책과 이유를 쪽지에 적어 넣고, 다른 누군가 적어 놓은 쪽지도 꺼내 가는 거지요. 같은 공간을 머물다 간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봤어요. 누군가에게 닿길 바라며 유리병 안에 흔적을 숨겨둡니다.


소파 한편에서 한 권의 책을 만났습니다. 상반되는 제목에 홀려 자연스럽게 집어 들었어요. 책을 쓴 작가님은 상실을 동력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을 지속하거나,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 있어 상실이 있었다는 문장이 깊이 들어왔어요. 시작이 아직 겁나는 저였거든요. 어쩌면 상실을 선택지로만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는 한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라는 원칙이 망설여진 날이 많았을 거예요. 하지만 큰 의미로서 시작은 삶의 어느 순간에나 존재하니, 상실 또한 피할 수 없겠지요. 잃는 것 또한 한 부분이라고, 다가오는 상실도 하나의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의 위안이 됩니다.


'무언가를 잃었기 때문에 또 다른 시작을 할 수 있다.' 원칙을 반대로 적어봤습니다. 같은 말이지만 다르게 느껴집니다. 누구나 경험하고 감당하고 있을 상실은 각자에게 또 다른 시작을 가져다줄지도 몰라요. 내가 생각했던 삶의 방향을 허무는 건 상실이 될 수 있지만, 그로 인해 새로운 계단을 쌓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해봅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집에 남겨진 사람이 더 생각납니다.


"여기 감자전 맛있는데.. 할머니 가져다드리자."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언니가 해줬던 말이 떠오릅니다.


"너 아빠랑 되게 애틋하잖아."


애정이 있는 글감은 더 잘 써진다고 하지요. 아빠에 관한 이야기가 술술 써지는 건, 아빠의 존재가 깊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이면에는 상실이라고 할 수도 있는 약함이 들어있더라고요. 한쪽 다리를 잃었지만, 늘 그 이상으로 최선을 다해주는 아빠라서요. 아빠가 집에 있다거나, 도시락을 싸준다는 말은 늘 하지 말라고 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당신의 약함이 자랑이 되었기에 부끄러움 하나 없었습니다.


가끔 이유 없이 두려울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 올라오는 때이기도 합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생각해 봤어요. 이유 없는 가짜 공포에 질 필요가 없다고, 두려움보다 더 큰 사랑이 나를 감싸고 있다고 다독입니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거리를 걸으니 눈 부신 햇살이 비춰요. 마음을 따라가나 봅니다. 온갖 여린 생명들 사이에서 크게 숨을 들이쉽니다. 가장 약한 것으로부터 사랑을 채워갑니다.


가장 약한 것으로부터 강하여지는 날들을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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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슬로우소소입니다:) 마지막 에필로그는 특별편으로 다루려고 해요. 2주 동안 잠시 여유를 가지고 6월에 에필로그와 함께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늘 봐주시는 작가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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