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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8. 오늘의 평범함을 행복으로

내내 함께 했던 사랑을 따라, 대전

by 슬로우소소

집 앞 산수유나무가 활짝 피었어요. 몇 개월 전만 해도 허전했던 정원이 어느덧 화려한 옷을 입은 꽃들로 가득 찼습니다. 긴 겨울을 보내고 4월이 찾아온 것이지요. 이달의 마지막 날, 피어난 생명이 또 있습니다.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작은 아이가 쓰고 그리기까지 28년이 지났어요.




모두 '빵의 도시'라 부르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집에서 쭉 자라온 저에게 이곳은 매우 편안하고 익숙한 쉼터였어요. 하지만 가깝다고 해서 모든 걸 다 아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할수록 쌓아두었던 소홀함을 조금은 덜어내고 싶었어요. 오늘의 목적지는 대전, 저의 고향입니다.


대전은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버스가 있습니다. 정겨운 파란색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를 가서 은행동에 내렸어요. 정확히 말하면 '으능정이 거리'입니다. 초등학생 때 옷 가게를 했던 부모님을 따라 매일 왔었지요. 직접 보고 옷을 구매하던 시기라, 주변 곳곳에 인파가 많았습니다. 카운터 너머로 고개를 쏙 내밀고 사람 구경을 하다 보면 밥시간이 됐어요. 때에 맞춰 식당 이모가 한상차림을 들고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모들과 매장 구석에서 맛있게 밥을 먹던 기억이 나요.


큰 수레에 카세트 테이프를 가득 싣고 오던 아저씨는 이제 어느 곳에도 볼 수 없습니다. 평범했던 한때의 모습이 흐릿해져요. 비디오가 가득 쌓여있던 만화책방은 무인카페로 바뀐 지 오래입니다. 잠들어있던 추억을 꺼내니 변함없다고 여긴 거리가 달라 보였습니다.




포장마차 거리 안쪽으로 들어가면 골목 끝에 <다다르다>라는 독립 서점이 나옵니다. 유리창에 적혀있는 문구가 눈에 띄어요.

'우리는 다 다르고, 서로에게 다다를 수 있어요.'

정말 그래요. 우리는 다 다른 사람이에요. 서점 안에 모인 사람들도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삶을 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서로의 거리가 가까운 건 '책'이라는 매개체 덕분일 거예요. 가끔은 서로가 연결될 수 있다는 통로가 있다는 것에 안도합니다.


<어쩌면 그 문장이 당신을 부르는지도 몰라요.>

카운터 옆에 랜덤으로 적힌 쪽지들이 있어요. 1층에 놓인 책들 속에서 발췌한 문장이었지요. 하나를 뽑아 펼쳐보니, 이런 문장이 나왔습니다.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되면서도, 제게 여전히 사랑은 어려웠습니다. 말하고 쓰는 것만큼 내 속에 가득 들어오길 원하는 게 사랑인데, 한편으로는 두려웠던 것 같아요.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주는 일이요. 이 정도면 나를 많이 아끼게 됐다- 싶으면서도 또다시 자신을 채찍질하는 날이 많습니다. 누구에게 칭찬을 받으려 했는지 우뚝 솟은 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물밀듯 차고 들어왔어요. 빈틈이 없으면 내가 가는 길만 보이니까요. 다른 이에게 선뜻 진심을 나눠주기에는 가진 사랑이 부족했나 봅니다. 이 좁은 마음에 사랑이 채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을 구입하니 긴 영수증을 함께 주셨습니다. [영수증 서점일기] 서점원들이 쓴 일기가 영수증에 적혀있어요. 이곳에서 다다른 책을 들고 카페로 향했습니다.



<한밭 카페> 우연히도 오늘 여행과 연관이 있는 이름입니다. 정성껏 가꾸어진 공간에 들어서자 메말라 있던 감정이 되살아났어요. 테이블마다 다른 세상이 녹여져 있었지요. 자리를 잡고 받아온 영수증 서점일기를 읽었어요. 그중 마음속에 들어온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 결국 성공의 기준을 바꾸는 것. 어쩌면 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 단순히 다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나답게' 사는 것. 우리는 각자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다. 성공이 반드시 경제적 보상이나 사회적 안정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 각자의 삶에서 '성공'을 정의하는 방법을 찾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내 인생 평생의 과제다. ]


마음이 비워지지 않았던 요즘입니다. 뭔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아무래도 이 짐 덩이의 정체는 '욕심'이었나 봅니다. 욕심은 근심을 일으킨다고 해요. 나만의 '성공'을 찾는 게 아니라, 재빨리 '성공한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심이 앞섰습니다.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니, 마음이 무거웠던 거지요. 기대에 부합하지 않으니 나를 포장하거나 나만 생각하는 일도 많아진 듯합니다. 이를 내려놓고 내 삶에서 성공을 정의하는 방법을 찾아가고 싶어요. 그렇다면 나만의 삶이 아닌, 다른 이의 삶도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요. 내면의 부족함이 깨어지기를 또 한 번 바라게 됩니다.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가 부엌 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한동안 기운이 없었던 할머니에게 고모가 전화를 거셨습니다.


"아니, 우리 00이 태어났을 때 말야. 내가 그때.."


언니들이 태어났을 때, 제가 태어났을 때- 시간을 거슬러 아빠가 태어났을 때를 회상하며 그때의 일화를 생생하게 푸는 할머니였어요.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얼마나 기뻤는지, 얼마나 큰 낙이었는지 이야기합니다. 나의 탄생에, 우리의 탄생에 한 사람의 기쁨이 잔뜩 묻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어요.




"밥맛이 없어도, 누룽지라도 먹어."


그날 저녁, 할머니의 말을 듣고 식탁 앞에 앉았습니다. 갓김치 하나를 밥 위에 얹어주는 나의 할머니. 입을 크게 벌려 한 숟갈을 하고 나니, 다시 갓김치를 밥 위에 얹어줍니다. 왜인지 이 평범한 순간이 너무 좋습니다.


"할머니, 나 또 얹어줘."

"응? 뭐라고?"

"나 또 이렇게 얹어줘."

"어! 그래그래!"


할머니가 좋다며 계속 김치를 얹어줍니다.

사랑을 얹어줍니다.



때로 삶이 당연하게만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내게 다가오는 현실이 삶의 전부인 것 같아 삶을 막 대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일의 일상 속에 이미 행복은 존재했어요. 평범함으로 치부되기 쉬운 하루 안에 사랑이 들어있었습니다. 진짜 나다움은 그 안에 있다는 걸 새겨봅니다.


오늘의 평범함을 행복으로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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