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한 질문을 받았다.
"만약에 네 자식이 뭐 하나 갖고 싶다고 막 바닥에서 굴러. 근데 그게 엄청 비싼 거야. 그럼 넌 어떡할 거야? 사줘? 아니면 단호하게 혼내?"
얼마짜리인지부터 시작해 무슨 장난감인지까지 '만약에'의 수많은 후보가 등장했다. 대부분 안된다는 의견이 속출해서 그런지, 그사이 말을 뱉은 나에게 이목이 쏠렸다.
"난 사줄래."
이유는 간단했다.
"벌써 아끼게 하고 싶지 않아."
속으로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눈앞에 실제 가격표가 있으면 의견이 달라지려나···.' 어쨌거나 아끼는 건 나중에 해도 충분할 테다. 그것이 돈이든, 진심이든. 더 이상 아끼고 싶지 않다는 다짐에도 여전히 계산하고 비교하고 따져가는 자신을 만나는 건 속상하니까.
기억난다. 부끄러워 당장이라도 삭제시키고 싶은 그날은 열아홉의 나에게 있어 아주 슬픈 날이었다. 울고불고하며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으면 상대가 가지 않을 줄 알았나 보다. 온 동네가 떠나가라 우는 소녀의 첫 이별은 미숙했다. 말 그대로 '떼쓰고, 소리 지르고,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쓴맛도 씹다 보니 익숙해졌다. 쓴맛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빨라졌다.
살아가며 얽히고설킨 인연이 마치 거미줄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줄이 촘촘해질수록 절제가 필요하다. 마냥 솔직해지기에는 이 줄이 걸리고, 마냥 드러내기에는 저 줄이 걸리고. 이 세계에 오로지 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습득할 수 있던 건 아끼는 것. 내 안의 어린아이가 맘껏 내던지던 속마음을 아끼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어린아이를 완전히 봉인한 것은 아니다. 아니, 봉인할 수 없다. 불현듯 튀어나오는 아이도 보듬어주고, 토닥여주는 게 필요했으니.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할머니와 함께 잤다. 모두가 조용한 새벽에 기상한 할머니는 분주히 움직였다. 이 틈을 타 손녀의 기다란 손톱을 깎아야만 했다. 혹시라도 깰세라 느릿느릿. 딸깍딸깍. 인기척에 눈이 떠지면 이미 손톱은 짧아진 뒤이다. 쓱싹쓱싹- 할머니가 사포로 작은 손톱을 매만져주던 소리. 이를 자장가 삼은 밤이 평안했다.
어른이 될수록 뒤척이는 밤이 싫어졌다. 그래서 가끔 그 밤이 생각났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손톱을 깎아달라거나,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그럴 수 없어서 그럴 수 있는 상대를 만나면 더 어린아이가 됐나 보다. 때로는 누군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안정이 됐다. 밤마다 유독 크게 들리는 나의 심장 소리 대신 그 사람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 내게는 없는 낯선 냄새를 맡는 것. 품을 찾아가는 것.
사실 나는 아직 어린아이로 남고 싶었다.
"어떡해? 갑자기 떨리는데? 어떡해! 재밌겠다!"
집 가까이에 놀이공원이 있다. 어릴 때 체험학습 장소로 자주 가던 곳. 왜 항상 똑같은 데만 가냐며 지겨워했던 나도 몇십 년 만에 본 이곳은 무척 반가웠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람. 대부분 아기가 있는 가족 단위가 많아 너무 높은 놀이기구는 운행하지 않는다. 아마 더 재밌는 곳들이 등장하면서 비교적 젊은 연령대가 빠진 것 같았다. 한때 한 시간 넘게 줄을 섰던 놀이기구가 바로 탑승할 수 있을 정도로 한산해진 풍경이었다.
앉은 좌석이 빙글 빙글 돌아간 채로 타는 롤러코스터. 출발할 때까지 안전바를 꼭 잡고 있던 그와 나는 어느 때보다도 몹시 들떠있었다. 어마어마한 이빨을 드러내는 호랑이가 신기하고, 사진 찍을 때 맞춰 손을 대주는 원숭이에게 고맙고. 겨우 탱탱볼 하나로 신나 하는 우리는 영락없는 초등학생 그 자체였다. 갑자기 행복하다는 기분이 든 건 단순한 이유 하나 때문이다. 침착한 아이들 사이에서 호들갑을 떠는 내 모습이 나쁘지 않아서. 유치해져서 좋다고 해야 할까. 나를 유치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 재밌다고 해야 할까.
배부르게 먹은 게 그저 나이 뿐이어서 다행이었다.
세월은 어떻게 해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많이들 이야기하듯,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언젠가 깊게 팬 주름이 더해지더라도 나의 어린 마음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을 것 같다. 배부르게 먹은 게 나이뿐이라 그래도 다행이라고 할 테니. 어떻게 해도 완벽한 어른이 될 수 없다면, 그런 게 없는 거라면 차라리 아껴왔던 것들을 실컷 드러내야겠다. 나의 행복이 감추기만 했던 어린 모습에서 온다면 굳이 막지는 않아야겠다.
어린아이가 되어도 좋으니, 나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에게는 숨기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