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그리운 게 있어?"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묻는 나에게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선뜻 대답해 주었다.
"아! 있어요. 7살 때 인형을 잃어버렸는데, 엄청 아끼는 거였거든요? 진짜 귀여웠는데···. 인형이 그리워요. 이제 다시 못 찾잖아요."
"그렇구나. 잃어버렸을 때 많이 슬펐겠다."
"근데 시간 지나니까 괜찮아졌어요. 보고 싶어도 뭐 어쩔 수 없죠."
아이는 그리움을 놓아주었나 보다.
"선생님, 저희 그림 그리지 말고, 게임해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귀에 달라붙을 몇 년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원칙이 있다. 어떤 학원에 있어도 꼭 마음을 늦게 주는 아이가 있다는 것. 말을 시켜도 반응하지 않고 대답조차 없다. 신기한 건 나중에는 그랬던 아이와 제일 많은 정을 주고받는다. 차츰차츰 부가 설명을 덧붙여주고, 먼저 말을 걸어주는 아이는 결국 제일 아끼는 학생이 되어있다.
아이들은 조금씩, 아주 단순한 이유로 마음을 열었다. 가르치는 것보다 우선시되는 건 만나는 것. 그저 수단 혹은 의무였던 의사소통이 언젠가부터 진심이 됐다. 책임을 진다는 건 이런 면에서 좋았다. 언젠가 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열기 위해 부단히 애썼으니. 관계를 소유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헤어짐이 가까이 오면 아쉬워했다. 아이들의 얼굴이 머지않아 가물가물해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 또한 한때가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거대한 비눗방울 왕국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후- 불면 뿜어져 나오는 비눗방울. 그렇게 생겨난 비눗방울은 심심한 나를 놀아주기도 하고, 곁을 맴돌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멀어져가는 비눗방울을 바라보다가 또 다시 숨을 크게 들이쉬고 후- 불어 새로운 비누방울을 맞이한다. 만남과 헤어짐이 연속인 삶에서 수많은 비눗방울이 탄생하고,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가끔은 멀어져 간 비눗방울이 생각나는 때도 왔다. 완전히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그리움으로 바뀌어 다가왔다.
"어, 여기 드디어 신호등 생겼네. 저기는 원래 미용실이었는데···. 언제 망했지?"
예부터 자주 왕래하던 동네. 기억과는 다른 낯선 간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줄곧 '핫플레이스'로 통했던 이곳을 오늘처럼 혼자 온 경우는 드물다. 이미 뒤바뀐 거리 곳곳에 과거가 달라붙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던 날과 대책 없이 밤을 새우던 날. 그때의 나, 그때의 상황이 여기저기 떠다니고 있었다.
"와플 킹사이즈···. 아니, 작은 사이즈로 주세요."
늘 가장 큰 사이즈를 시켜 오목조목 나눠 먹고는 했으니, 습관처럼 킹사이즈라는 말이 나와 버렸다. 하지만 이미 채울 대로 채운 배이기에 욕심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 그냥 가기가 아쉬워 들어온 카페는 10년이 넘도록 큰 인기를 차지하고 있었다. 방문할 때마다 친절한 미소를 지어주던 매니저 언니도 역시. 나오는 음악하며, 기둥에 적힌 낙서 하며- 달라진 모든 것들 사이에서 그대로임을 입증하는 이 공간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 안에 내가 그리워하는 것들이 있다.
후덥지근한 새벽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건지, 멀리 떠난 비눗방울이 생각난 건지. 그날 밤 꿈에서 스케이트장에 갔다. 정확히 말하면 한때의 나를 꿈에서 보았다. 딱 한 번 친구와 야외 스케이트를 타러 간 적이 있다. 당시의 나에게는 당연했던, 이유 없이 결성된 만남이었다. 친구는 얼음 위가 낯설어 비틀거리는 나를 과감히 잡아주었다. 훨씬 작은 체구임에도 스스럼없이 앞으로 척척 가는 친구를 의지했다.
갈수록 목적 없는 만남은 줄어들었다. 헛소리에 떠나가라 웃고, 집에 들어가기 싫어 정처 없이 배회하던 젊음.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를 만나 매일을 흘려보내던 나도 흐려졌다. 원래 그런 법이라는 듯이 슬그머니 이동하는 비눗방울을 눈치채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청춘도 각기 다른 모양을 이루어 가는 듯했다. 그때의 열정이 온통 빨갛고 노란 튤립밭과 같았다면, 지금의 열정은 그보다는 단출해진 기분. 시시각각 분출되던 에너지를 골라내어, 내게 맞는 꽃 하나만을 남겨뒀다. 화려하지 않아도 향이 그윽한 꽃. 이 꽃을 어디에 놓으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연못 옆에 심기로 했다. 연못이 되기를 바란다는 내 이름에 맞게, 깊숙이 심어진 열정은 늘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마침내 그 고요함이 편안한 사람이 됐다.
튤립밭에서 함께 뛰놀던 방울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 또한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가져 새로운 자신을 가꾸고 있을까. 그리움이 받아들여진 먼 훗날,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제 나의 그리움을 놓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