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마다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는 나무가 굳세다고 느꼈다. 그들이 보여주는 질서가 참 푸르다. 이 빛깔에 매료되니 또 다른 수려함을 찾았다.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흩어지는 구름의 모양, 물결과 하나 된 가로등. 눈앞의 벅참을 잊고 싶지 않아 종이에 슬며시 그려보았다. 그 페이지에는 작은 바람도 들어가 있다. 시간이 흘러도 아름다움을 눈치챌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때마다 나의 찬란함을 간직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밤새 뒤척이던 엄마가 뒤늦게 잠에 들었는지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게 됐다. 정갈한 눈썹 문신과 기다란 속눈썹. 아이라이너가 다 안 지워졌나 하고 자세히 보니 그냥 눈가의 주름이었다. 아무리 동안이라 한들 세월이 묻은 주름은 지울 수 없었나 보다. 당연한 걸···. 떠오르지 않는다. 60대인 지금도 높은 구두와 샤랄라한 치마를 입는 엄마가 정말 내가 생각하는 꼬부랑 할머니가 된 모습이. 할머니 중에서 가장 고운 할머니가 될까. 상상 속에서 훗날 엄마의 얼굴이 빚어졌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꽃 만지고 있으면 막 힐링 돼. 힘든 게 사라진다?"
매일 피곤함에 지쳐있던 엄마에게서 낯선 말이 나왔다. 나이가 들면 꽃이 더 좋아진다고 했던가. 꽃을 보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엄마는 얼마 전부터 플라워클래스를 듣기 시작했다.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웃고 있는 엄마는 누구보다 소녀 같았다. 지금의 찬란함을 꽃송이 안에 담아둔 듯이 보였다.
늦은 밤 울린 핸드폰. 일을 하고 돌아온 디디에게서 전화가 왔다. 몇 시간 전 마무리 인사를 하고 난 뒤이기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나 했다.
"이 시간에 소소한테 전화하는 이유가 있어. 의지는 소소한테밖에 할 수 없으니까."
마음이 찡하다. "그거참 뭉클해지는 말이네?" 하고 작은 웃음을 더해보지만, 미세하게 울먹거리는 그를 완전히 안아줄 수 없음이 미안하다. 디디는 여린 사람이지만 어디서나 쉽게 이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들이닥치는 폭풍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울고 싶으면 울라는 말에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하던 그이다.
이런 디디가 언젠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이 있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그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소금산. 답답할 때 출렁다리를 건넌다는 디디는 큰 폭풍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를 수척하게 만든 상황이 미워질 만큼. 모든 게 처음인 우리였으니 이 고단함을 이고 가는 건 더욱이 서툴렀을거다. 하지만 한 계단 두 계단을 오를수록 보이는 게 달라져 갔다. 중요한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나 여건보다 그라는 존재 자체였다. 아찔할 정도로 광대해진 풍경에 각자가 지고 가던 고단함이 작은 점이 됐다는 것도. 그렇게 나는 다이어리 한 페이지에 이날 본 아름다움을 새겼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오늘, 그와 내가 다시 출렁다리 위에 섰다. "전이랑 비교해 보면 달라진 게 뭐가 있을까?" 질문하는 디디의 안색은 매우 창백했다. 공사 중이던 케이블카가 완공됐다는 점, 약해진 체력이 눈에 띈다는 점- 변한 점들은 꽤 많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여전한 게 있었으니, 출렁다리 위의 우리다. 흔들거리는 다리를 무서워하며 걷는 그와 아무렇지 않아 하는 나. 어찌저찌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니 디디는 후련한 듯 크게 숨을 뱉어냈다.
"역시 눈앞에 더 무서운 게 있으니까 그동안 두려웠던 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그가 다리를 건너는 건 두려움을 잊기 위한, 아니 이겨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 듯 계단을 내려가는 그가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 출렁다리 데려간 사람이 엄마야. 엄마가 퇴사하고 나서 걱정되는 게 많았나 봐. 엄마랑 나랑 똑같거든. 막 다리를 미친 듯이 덜덜 떨면서 건너는데 오히려 힘들었던 게 사라진대. 엄마가 고생하지 않았으면 싶더라."
말을 마친 디디는 멀리 있는 산을 한참 바라보았다. 우리의 시선은 같았다.
그때의 힘듬을 보내고 새로운 힘듬을 맞이했다. 그래서 또 한 번 지금의 힘듬을 보내고 새로운 찬란함을 새겼다. 언제까지나 이럴 수 있었으면. 고달픔이 적힌 삶의 페이지에 밝은 등불 하나 놓을 수 있었으면. 나에게 있는 작은 바람을 몇 번이고 읊어보았다.
나이가 들면 어떨까.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어떤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을까. 아득한 날들에 빛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