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손에 제각각 무거워 보이는 짐이 들려있다. 과연 긴 연휴를 앞둔 저녁다웠다. 정류장 간격이 짧아 버스가 멈출 때마다 엄청난 인파가 몰려왔다. 그 덕에 뒷자리까지 떠밀려 오로지 손잡이만을 의존해야 했다. 바깥에서 보면 이 복작대는 버스 안이 얼마나 콩나물시루 같을지. "잠시만요, 내릴게요!" "비켜주세요!" 여기저기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를 채울 무렵, 현재 발을 내딛고 있는 장소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 하나를 목격했다. 웬 커다란 거미가 창에 붙어 집을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쌩쌩 달리고 있어 바람이 강할 텐데 이에 꼼짝하지 않고 부지런히 집을 만든다. 참으로 여유롭고, 우아하게. 그 현란한 솜씨에 빠져든 나는 내릴 때까지 거미를 응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왜 뜬금없는 자리에 집을 짓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우연히 엿본 생존 본능에 시선이 멈춰버렸다. 무엇이 거미를 이리도 움직이게 했을까.
주변의 소음을 만류하고 자기 일을 해 나가던 거미는 그날 집을 다 지었을까?
주말 오후 방문한 한적한 동네. 골목 어딘가 특별한 곳이 숨겨져 있다. 독특한 포스터가 붙여진 건물을 찾아 곧장 지하실로 향했다. 내려갈수록 크게 들리는 재즈풍 음악은 기분을 신비롭게 달구기도 했다. 마침내 도착한 소극장, 문을 열면 이곳을 온 목적과 딱 맞는 광경이 펼쳐진다. 이름하여 마술 공연. 오후 4시를 알리는 소리가 울리자 빨간 커튼이 걷혔다. 등장한 마술사를 맞이하는 건 단 네 사람. 엎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아주 능숙하고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마술사였다.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여기서 깨달은 점도 하나 있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재미뿐만이 아니라는 것. 호기심이라고 해야 할까, 보이지 않는 트릭을 간파하겠다며 괜한 인상을 찌푸렸다. 헛된 의문은 나만 품은 게 아닌듯했다. 큐브 마술을 진행할 때였다. 관객이 한 차례씩 돌아가며 무작위로 큐브를 맞춰놓았다. 마술사는 관객의 손을 주시하며 바뀐 큐브의 모양을 외우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 행동을 본 직후 관객 사이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어, 근데 이거는 마술이 아니지 않아?"
고개를 끄덕인 마술사는 넌지시 한마디를 뱉었다.
"이 마술을 하면 놀랍게도 다들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어, 이거는 마술이 아닌 것 같은데?' 혹은 '그냥 똑똑하기만 하면 되잖아.' 그럴 때 저는 불신을 또 다른 확신으로 바꾸어 드리죠."
심심했던 마술이 이 대사 후에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비밀로 하겠다. 말할 수 있는 건 더욱이 소란스러워진 반응. 물론 좋은 쪽으로다. 아쉬운 목소리를 동력으로 삼아 이보다 더 큰 박수를 받아낸 공연은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선생님, 저 미술 그만할지도 몰라요."
미술대회에서 1등을 받아온 아이가 갑작스러운 통보를 전했다. 아이의 말이 당황스러웠던 나는 물음표를 띄었다.
"앞으로 계속 그림 그리고 싶다 하지 않았어?"
"네. 근데 공부해야 한대요. 지방대 갈 생각이면 대학조차 가지말래요."
이어진 정적이 불편할까 싶어 말을 늘렸다.
"아쉽다. 웹툰 작가가 꿈이라고 했잖아."
"음, 선생님 해야 할 것 같아요. 미술 선생님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냥 공무원 쪽···."
"그래도 앞으로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때는, 그때는 끝까지 해나가면 좋겠다. 입술을 반쯤 열었지만, 복합적인 감정이 들어 꾹 다물었다. 대단한 걸 이루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미 그대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싶었는데. 그러니 언젠가 힘을 다하고 싶은 게 생기면, 널 망설이게 하는 것에게 무조건적인 양보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너와 나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해가 질 녘, 다시 같은 버스에 올라타 손잡이를 잡았다. 수첩과 이어폰을 꺼내려 주머니를 뒤적거리니 기다란 줄이 잡혔다. 아차, 쓰던 걸 잃어버려서 급하게 가져온 유선 이어폰이다. 오래된 이어폰은 깊숙이 꽂아보고 볼륨을 높여봐도 외부 소리가 차단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하려던 걸 하기로 했다. 거미가 집을 짓던 것처럼 나 또한 소음 속에서 나름대로 집을 짓기로 했다. 설령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그러니 내가 수첩 한편에 얼마나 많은 문장을 적었는지, 얼마나 완성도 있는 스케치를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졌다. 어쩌면 그런 건 거미에게도 중요하지 않을 거다. 그날 집을 모두 지을 수 있는지보다, 굴하지 않고 집을 지어간다는 행위 자체가 큰 의미로 남을 수 있으니.
그런 희망을 꼭 잡고 싶어졌다.
어떻게든 해나가는 하루. 어떻게든 살아가는 나날. 수많은 소음 속에서 희망을 붙잡는다. 내일도, 앞으로도 있을 만한 터를 마련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