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밤 산책

이집트 출장기 -3

by slowind

외국에 나갔을 때 나만의 루틴 중 하나는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 나 홀로 조깅을 하는 것이다. 구글맵을 이용해 대략적인 방향만 정해놓은 뒤 무작정 달려 나간다. 두 다리를 이용해 나아가다보면 때로는 울퉁불퉁한 골목길을 때로는 끝없는 돌계단을 마주한다. 아무렴 어떠랴. 그렇게 계속 달리다 보면 현지인들만이 알고 있는 도시의 진짜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동네 빵집에서 풍겨져 나오는 빵 굽는 냄새, 아침 일찍 비린내 가득한 생선을 가득 실고 어디론가 향하는 수레, 그리고 늦은 밤 취기를 빌려 호기롭게 내뱉는 사랑고백까지.


아쉽게도 이번 이집트 출장에선 조깅을 할 기회가 없었다. 생각보다 출장 일정이 빡빡했고 무엇보다 심각한 매연 불안정한 치안 때문이다. 카이로 시내는 언제나 매캐한 매연에 파묻혀 있었다. 호텔 창문 한번 제대로 열 수 없을 정도이니 조깅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최악의 환경이었다.

호텔에서 본 카이로의 야경. 매연 때문에 창문을 열 진 못했다.

출장 마지막 날 밤이 다가왔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호텔에 들어와 침대에 몸을 던지려던 순간. 이런 생각이 불현듯 찾아왔다. '내가 또 언제 카이로에 와 보겠나. 매연을 한껏 들이키더라도 일단은 나가보자'. 몸에 꽉 끼는 셔츠를 벗고 헐렁한 후드티를 입었다. 기지개를 한 번 쭈욱 켠 뒤 여행가방에서 구겨진 러닝화를 꺼내 신었다. 지도를 보니 호텔에서 20여 분만 걸어가면 나일강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텔 밖을 나오자마자 매캐한 매연이 마스크 안으로 스며 들어왔다. 클락션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고, 사람들은 거리 곳곳에서 연초를 뻑뻑 피워댔다. 무엇보다 목표지점에 도착하기 위해선 총 3번의 길을 건너야 했다. 카이로에는 도무지 신호등을 발견할 수가 없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무단횡단을 한다. 한 가지 커다란 특이점은 차와 사람 모두 자신들의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이다. 웬만해선 방향조차 바꾸지 않는다. 옷깃이 스칠 정도로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하며 모두가 각자의 길을 간다. 5일간 이런 광경을 밤낮으로 목격했지만 단 한 번도 사고가 난 걸 본 적은 없었다. 현지인들의 몸에는 무단횡단을 위한 일종의 '리듬감'같은 게 몸에 밴 것 같았다.

차선을 무시하고 달리는 차들. 차도를 걷는 말. 여유롭게 무단횡단을 하는 행인. 카이로의 시그니처(?) 풍경이다.

문제는 나는 현지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눈앞에 펼쳐진 6차선의 차도를 도무지 건널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청년들이 자연스럽게 차도로 걸어 들어갔다. 이때다 싶어 그들 무리에 바짝 붙어 차도를 건넜다. 차들은 제 속도를 유지하며 내 앞과 뒤를 지나갔다. 길을 건너고 나니 왠지 모를 성취감이 느껴졌다. 길잡이(?)가 돼준 청년들에게 향해 속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슈크란.


적다 보니 모든 게 엉망진창인 것 같지만... 걷다 보면 카이로 특유의 이국적 정취가 느껴졌다. 처음에는 무척 거슬렸던 클락션 소리가 하나의 효과음처럼 들리고, 밤하늘을 감싸는 뿌연 연기는 왠지 모를 신비로운 분위기를 감돌게 했다. 이곳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 못지않게 화려한 손짓을 사용하며 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경쾌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한 걸음씩 걷다 발길을 멈추게 하는 건축물을 우연히 마주했다. 경찰들이 지키고 있는 단단한 철문 너머 거대한 야자수가 줄지어 늘어서 있고 그 뒤로 커다란 모스크처럼 보이는 분홍색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집트 현대미술관 야경.

철문에는 별다른 간판이 달려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문을 지키는 경찰에게 무슨 건물이냐고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구글맵을 켜 확인해보니 이집트 현대미술관이었다. 이집트와 현대미술. 4500년 된 피라미드를 보고 와서일까. 커다란 이질감이 느껴지는 두 단어였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졌다. 수천 년 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예술작품을 남겼지만 그 이후 길고 긴 피지배의 역사를 지나온 이집트. 그들이 예술을 통해 그려낸 '지금'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개장시간을 찾아보니 오전 10시였다. 조금 서두른다면 비행기를 타기 전 돌아볼 시간이 충분했다. 걷지 않았다면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숨겨진 장소(숨겨졌다기에는 너무나도 컸지만...)를 찾아낸 것만 같았다.


참고로 나일강의 야경은 그리 아름답진 않았다. 곳곳이 공사 중이었고 한가로이 야경을 즐길만한 벤치도 마땅치 않았다. 거기다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말똥 냄새까지... 아무렴 어떠한가. 이 또한 카이로의 모습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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