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콩을 가는 기쁨

by slowind

커피콩을 직접 갈아 커피를 내린지 5년이 지났다. 연애 초반 컨셉 아니냐는 의심을 했던 아내도 꾸준히 커피를 갈아내는 끈기를 드디어 인정(?)해줬다. 핸드드립은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우선 커피포트에 정수된 물을 넣고 끓인다. 물이 끓고 나면 거름종이를 뜨거운 물로 한번 필터링한다. 그다음 그라인더에 커피 원두를 넣고 갈기 시작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서다). 원두가 곱게 갈리면 거름종이 위에 원두를 털어 넣는다. 마지막으로 끓는 물을 주전자에 옮겨 담은 뒤 원두 위에 천천히 부어가며 커피를 내린다. 커피 캡슐머신이 있다면 버튼 하나로 끝날 일을 이렇게 하나씩 직접 처리해야 한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굳이 핸드드립을 시작하게 된 이유. 저마다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가 너무나도 비쌌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커피를 찾는 빈도가 늘어났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한 잔. 점심을 먹고 피곤해서 또 한 잔. 동료들과 회사 욕을 하기 위해 다시 또 한 잔. 그렇게 나도 모르게 새어나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커피 한 잔을 대략 4000원으로 잡았을 때 한 달에 20만 원 1년이면 240만 원, 10년이면... 주말 아침에 혼자 침대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하다 차라리 자급자족(?)해야겠단 결론에 도달했다.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해내는 그라인더.

곧바로 인터넷에서 특가 세일 중인 2만 원짜리 커피 그라인더 그리고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5천 원짜리 드리퍼와 주전자를 주문했다. 바로 다음 날 배달이 왔다. 집 근처 스타벅스에서 사 온 원두로 생애 첫 핸드드립을 시도했다. 그라인더 안에 원두를 붓고 나무로 된 동그란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시계방향으로 힘차게 돌렸다.


드르륵 드르륵-


톱니바퀴 안에서 커피콩이 으깨지기 시작했다. 고소한 커피 향이 방 안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손잡이를 타고 고스란히 전달되는 그 진동. 원두가 갈릴수록 처음에는 뻑뻑했던 손잡이가 점점 부드럽게 돌아갔다. 스무 바퀴 정도를 돌렸을까. 원두가 모두 갈렸는지 아무런 저항 없이 손잡이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라인더 뚜껑을 열어보니 고소한 커피 향이 뿜어져 나왔다. 커피콩은 고운 가루가 된 채 그 안에 있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성취감. 겨우 커피콩 하나 갈아낸 것 가지고 무슨 유난이냐고 말하겠지만 나는 고운 커피가루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매일매일 만날 수 있을 작지만 확실한 성취감.


그렇게 나는 성실하게 커피콩을 갈기 시작했다. 막 내린 신선한 커피를 마신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커피콩을 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커피콩을 갈 때면 붓글씨를 배웠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붓글씨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먹을 가는 건 무척 좋아했다. 벼루에 물을 붓고 까만 먹을 계속 돌리다 보면 어느새 먹물이 만들어진다. 돌리면 돌릴수록 먹물의 색깔은 진해지고 농도도 짙어진다. 그 과정이 뭔가 신기하고 뿌듯했다. 먹을 간다는 건 어린 시절 내가 느낄 수 있던 작지만 확실한 성취였던 셈이다.


집에 놀러 온 친구들에게 커피콩을 갈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절반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절반은 "요새 커피머신 많이 싸졌는데 하나 사줄까?"라고 물어본다. 그러면 나는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커피를 만들어내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거기서 대화는 끊겨버린다. 여하튼 올 한 해도 그리고 10년 뒤에도 나는 아마 커피를 내려 마실 것이다. 어쩌면 고단한 삶을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건 이런 소소하고 확실한 성취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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