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어시인 Nov 21. 2021

시각 중독증

보는 것에 계속 건강하게 중독되고 싶다. 

어릴 때, 나는 음성으로 남아있는 추억이 별로 없다. 대부분 누군가의 입모양, 누군가의 얼굴 표정 및 행동으로 기억하고 있다. 


학교 다닐 때는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선생님 입모양과 교과서의 글자를 찾으며 내용 맞추느라 딴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한 번은 선생님께 혼나는 시간이었는데 나는 무슨 말하는지 알아듣기 위해 선생님 입모양을 봐야 했기에 얼굴을 드는데 선생님은 버릇없이 왜 쳐다보냐고 더 혼내는 바람에 난 너무나도 억울했다. 

하지만, 그 당시엔 나도 어렸고 잘 몰랐기에 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억울한 마음으로 눈물만 흘리며 속으로 삭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여전히 왜 혼났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억울한 마음만 남았을 뿐.     


보청기를 교체하는 주기 5년쯤이 될 때마다 엄마께서는 항상 최고급 성능을 나타내는 보청기를 구입하셨다. 첫날에는 뭔가 소리 스타일이 새로운 것 같아 더 잘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과 똑같았고 여전히 잘 안 들렸다. 그에 따라 나의 청능이 개선되고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시각 정보로 대체하여 청력 결핍을 보완하는 능력이 향상되고 있었다. 

아마도 내 몸속 유전자가 생존을 위해 시각적으로 더 발달시키려는 본능을 발휘했을 것이다. 


더 잘 보아야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테니까.     


30년 넘게 늘 그렇듯 나의 부족한 청력을 신경 쓰며 갑자기 보청기 고장 날까 봐 조마조마한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일하던 중 소리가 뚝 끊기게 되는 날에는 상사에게 죄인처럼 머리를 수그리며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조퇴를 신청하고 바로 보청기 수리하러 가야 했다. 

그때마다 참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억울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내 운명을 수긍해야 하나 씁쓸한 마음이었다.


 ‘왜 난 이런 걸 겪어야만 하나? 하... 언제까지 내가 이러고 살아가야 하는 거지?’ 


안 들리는 상태로 지하철을 타며, 나의 눈은 더 바빠졌다. 여기가 무슨 역인지 확인하느라 전광판을 계속 주시해야 했고, 엄지 손가락들은 나의 이런 상황을 동료에게 알리기 위해 문자 보내기 바빴다. 무사히 수리를 마치고 난 후 다시 들리는 세상이 반갑지만 한편으로는 언젠가 또 그런 일을 겪어야 한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2018년 2월, 수어를 처음 접한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본격적으로 시각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나의 청각 결핍에 대한 무능감, 낮은 자존감은 점점 회복되고 보청기 고장 및 예상치 못한 소리 결핍에 대한 불안감도 차츰 사라졌다. 수어를 배우면 배울수록 나는 점점 보청기를 내려놓는 시간이 길어졌고 무음의 세계가 참 즐거웠다. 

시각 정보를 끊임없이 받아내느라고 눈에 번아웃이 온 적도 있었지만,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면 금방 회복되었다. 시각에의 의존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이젠 중독 수준까지 도달한 듯했다. 영상 속 자막, 수어, 사람 입모양 어느 것 하나 보이지 않으면 소통이 잘 되지 않았고 시각적인 측면에 점점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또 다른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 언젠가 내가 눈이 안 보이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살지?’   

  

에라, 모르겠다.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하고 지금에 충실하자. 

하루라도 가족들의 이야기를 보고, 재미난 영상의 자막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고, 수어로 소통하며 지내느라고 24시간도 모자라는데 걱정할 시간도 없지~


시각 중독증, 맞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면서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나고 있으니 건강한 중독이라고 보련다. 난 계속 중독되고 싶다. 지금처럼 입모양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얼굴 많이 보고 많이 웃고 많이 기억하면서 매일 행복한 하루에 중독되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잘 보는 사람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Proposal of J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