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첫눈

by 민들레



첫눈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온통 새하얗다. 눈이 내리면 언제나 그렇듯 감상적이 된다. 게다가 첫눈이라니. 들뜬 마음으로 아직도 눈발이 날리는 밖으로 나간다. 이럴 땐 나이를 잊는다. 첫눈이 이렇게나 예쁘게 내렸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그것도 쑥스러워 언제부턴가 혼자만의 감상의 시간을 갖는다. 뽀드득뽀드득, 발밑에 눈을 밟는 감촉과 내 발소리가 기분 좋다.


첫눈치고 꽤 많은 양이 쌓였다. 아이들이 신나서 눈사람을 만들며 올겨울 들어 처음 맞이하는 눈 잔치를 마음껏 즐기고 있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함께 나온 아빠 엄마들도 모처럼 즐거운 표정들이다. 코로나 19로 지친 일상에 모처럼 생기가 돋는 것 같아 그들을 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푸근해진다.

20201213_102232[1].jpg


공원 한쪽 나무들 사이에 아직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눈 덮인 새하얀 장소가 보인다. 가까이 가서 그곳에 내 발자국을 찍으려다 잠시 머뭇거린다. 이처럼 소복이 쌓인 깨끗한 눈을 보면 왜 자신의 첫 발자국을 새기고 싶은 것일까. 이대로 오롯이 남겨둘까? 그렇지만 내가 아니어도 이곳은 금세 다른 누군가의 발자국들로 어지럽혀지리라는 짐작을 한다. 나는 이내 내 발자국이 처음이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느낌을 스스로에게서 감지하며, 발을 들어 눈 위를 밟았다.


20201213_102131[1].jpg

볼품없는 내 발자국들을 돌아보다가 문득 이청준 님의 단편 <눈길>이 생각났다. 아들과 함께 발자국을 남기며 갔던 눈 쌓인 길을, 아들을 보내고 그 발자국을 따라 홀로 되돌아올 때의 애달픈 모정, 어머니가 아닌 사람이 그런 심정을 이해하기란 어렵겠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또 천승세 님의 <혜자의 눈꽃>을 떠올렸다. 어린 혜자는 시계방향을 따라 맴돌면서 소복이 쌓인 눈 위에 앙증맞고 예쁜 눈꽃을 만들었다. 병든 엄마를 위해서였다. 나도 혜자처럼 해보았다. 내가 새긴 발자국이 혜자의 눈꽃처럼 예쁘기를 바라는 건 무리였다.


20201213_104457[1].jpg


상념을 놓고 평소처럼 산책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쌓인 눈을 이불처럼 덮은 채 비죽이 얼굴을 내민 아직도 푸른 빛깔의 작은 몇몇의 잡초들과, 몸을 떨며 얹힌 눈을 털어내는 소나무를 지나 산책할 때마다 잠시 멈추게 되는 단풍나무 앞에 이르렀다. 붉은 화려함으로 가을을 불태우던 단풍나무는 물기 빠진 건조한 모습으로 머리마다 하얀 목화솜을 피우고 있다.


조금 더 가면 시선을 사로잡던 붉디붉은 보리수나무 열매가 있었다. 농익은 탱탱함으로 금방이라도 터질듯하던 열매들이 역시 힘 빠진 상태로 하얀 눈에 싸여있다. 공원 가운데 작은 개울가의 갈대들은 모자처럼 흰 눈을 쓰고서 무거운 듯 고개를 떨군 모습이었다. 통통한 새 한 마리는 날갯짓하며 나뭇가지 사이를 옮겨 다니기에 바쁘다.


20201213_104830[1].jpg


이 길을 지날 때 만나는 늦게 핀 장미 몇 송이가 궁금했다. 야무진 제 친구들은 철 맞게 꽃을 피우고 이미 떠났건만, 물정 모르고 찬바람 불 때에 피어난 그 장미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잔함을 불러일으켰다. 친구가 없는 어린 장미꽃은 외로운 듯했으나 더 귀하고 예뻤다. 첫눈 내린 겨울 속 장미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며 걸었다. 장미와 마주친 나는 놀랐다. 이렇게 예쁠 줄이야! 만개하기 직전의 청순한 장미는 하얀 면사포를 쓰고 있었다. 머리와 어깨를 순백의 눈이 포근히 감싼 모습이다. 혼자서 바람을 맞던 가녀린 장미를 따뜻한 첫눈이 사랑스러운 신부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꽃 신부에게 말을 걸어본다. “처음 눈송이가 네 피부에 닿을 때 추웠니? 하지만 지금 너무 예뻐. 이렇게 예쁜 너와 눈인사를 나눌 수 있는 내가 행운이구나.” 아직 어린 장미 신부는 조금 놀란 듯 얇은 꽃잎을 가늘게 떨며 대답이 없다. 조금 전보다 가늘어진 눈발이 여전히 허공을 채운다. 첫눈 내린 날, 접어둔 가슴속 설렘 한 자락을 펼치고서 늘 다니던 산책길을, 오늘이기에 만날 수 있었던 자연의 새로운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걸었다.


20201213_102232[1].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