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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노트 한 장

by 민들레

아주 오래전,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었습니다. 서울에 살고 있었고 시댁인 지방에 다녀오느라고 서울행 열차를 타고 있었어요. 열차는 적당히 한산한 편이었고 내 옆 좌석은 비어 있었습니다. 가족과 함께가 아닌 나 혼자 다녀오는 길이었지요.


초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이었던 것 같군요. 나는 답답한 객실에서 나와 달리는 열차의 승강기 손잡이를 잡은 채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습니다. 당시엔 열차가 달릴 때도 승강기 문이 지금처럼 차단되지 않고 오픈된 형태였거든요. 물론 승무원 눈에 띄면 위험하다고 제지를 당하기는 했어요.


나는 승강기 손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신선한 바람을 마음껏 호흡했습니다. 열기가 식은 태양이 늦은 오후를 향해 흘렀고 바람은 내 시폰 블라우스의 소매 자락을 부풀렸습니다. 나는 객실로 돌아와서도 줄곧 차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턴지 내 옆 좌석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어요. 그는 내게 자기소개를 하며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었노라고, 그러면서 내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개방된 시절이 아니어서 젊은이들이 순박하고 수줍음도 많았습니다. 미투라던가 하는 개념 자체가 없었지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를 미혼으로 생각하고 호감을 보였던 거죠. 내가 별 반응을 나타내지 않자 그는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낯선 남자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묵묵부답이라고 생각했던지 자기의 진심을 설명하려고 애썼습니다.


“나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오는 길인데, 사실 용산에서 내려야 했어요.” 열차가 용산역을 지났음을 그제야 알았죠. 그는 일행과 목적지에서 내리지 않고 나를 따라온 것입니다. 내가 내릴 곳은 열차의 종착지인 서울역이었어요. 그는 크고 서글서글한 눈으로 부드럽게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훤칠한 키에 쾌활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어요. 애매한 내 태도로 인해 그는 초조한 것 같았습니다.


묻지도 않은 자기 얘기를 들려주더군요. “내 나이는 스물여덟이에요. 대학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왔어요. 00 기업에 취직할 거 같아요. 입사하고 나면...... ” 그는 미래의 구체적인 플랜까지 내게 자세히 말해주었습니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역력했어요. 살고 있는 지역과 부모의 직업까지. 내 마음, 아니 내 입을 열게 하려고 그는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이름을 말했을 뿐입니다.


책갈피 속에 넣어둔 호접란 꽃잎

내가 어떤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어서 얘기를 주저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나한테 얘기해 보세요. 무슨 얘기를 해도 난 다 이해할 수 있어요.” 그가 내 표정에서 무엇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었어요.


내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말하기엔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솔직히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별다른 연애 경험도 없이 어쩌다 너무 일직 유부녀가 되어버린 내게 그토록 다정하게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낼 힘이 부족했습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마음은 전혀 없었기에, 입을 다무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나 역시 답답하고 미안했습니다. 처음 몇 마디 붙여보다가 반응이 없으면 ‘이상한 여자네’ 하면서 단념할 줄 알았거든요.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했고 벌써 저녁이었습니다. 그와 헤어지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산이었어요. 그는 나를 그대로 보낼 순 없었던 모양입니다. 근처 다방에 들어가 얘기를 더 나누자며 내 짐 가방을 들고 돌려주려 하지 않더군요. 그는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해줄 말이 없어 안타까운 나는 이 사람이 빨리 가 주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단호한 태도로 그를 뿌리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멈추지 않고 따라오더군요. 정류장으로 가는 동안에도 무거운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며 내게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시골에서 시어머님이 이것저것을 싸주셔서 가방이 무거웠습니다. 나는 미안하고 창피하고 민망해서 가방을 빼앗고 싶었지만 더는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순수하고 정직한 그의 진심에 내심 감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정하더군요. 이야기 좀 하고 가라고. 그가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나는 끝내 고개를 저었습니다. 결국 체념한 그는 전화번호를 적어 내게 주었지요. 꼭 전화하라는 말을 몇 번이고 당부하면서, 버스를 타고 떠나는 나를 지켜보았습니다. 내가 결혼한 사람이라는 말을 못 한 것이 미안했어요. ‘그렇게 고집 센 여자는 처음이야’라는 생각을 그가 했을 것 같습니다.


당시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 만난 내게 그토록 열정적으로 다가온 그가 놀라웠고, 한편 고마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나는 그다지 예쁘지 않았고 특별한 매력을 지녔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거든요. 당시 그의 집은 경기도 어느 지역이라고 하더군요. 나는 얼마 전부터 그가 젊은 시절 살았을 그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가벼운 스케치처럼 잊고 지냈던 젊은 어는 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영상처럼 각인되어 있음을 글을 쓰면서 알았습니다. 그 사람의 진솔한 마음을 잊을 수가 없었나 봅니다. 이제 와서 의미 없는 일이겠으나, 그에게 너무나 늦은 사과의 말이나마 전하고 싶군요. 많이 미안했다고.


오랜만에 펼쳐본 젊은 시절 기억의 책장을 조용히 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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