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친구
심리학분야의 선배이자 멘토이며 친구이기도 한 그녀와 찻집에 마주 앉았다. 나이는 내가 몇 살 더 앞서지만 상호 소통이 잘 되고 공유되는 점이 많아 만나면 늘 즐거웠다. 사는 집도 서로 멀지 않아서 생각나면 부담 없이 점심이나 저녁을 함께할 수 있어 좋았다.
대화 도중 그녀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갑자기 물었다.
“샘은 어떻게 그렇게 소녀 같은 모습을 지닐 수가 있어요?”
우리는 서로의 호칭을 ‘샘’으로 불렀다. 그녀의 말이 끝나는 즉시 나는 말했다.
“나의 어떤 점이 소녀 같은지 꼭 집어 얘기해 줘 보세요.”
사실 나도 이점이 궁금했다. 젊을 때나 나이가 든 지금이나 그와 비슷한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나의 어떤 행동이나 말이 남들에게 그렇게 비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내게 나이와 안 어울리게 순수하다(말하기 민망함)는 딱지를 붙이는 사람에게 묻곤 했었다.
“내 나이에 순수하다는 건 바꿔 말하면 철딱서니 없거나 좀 부족하다는 뜻으로도 들리거든. 자세히 좀 말해줘 봐. 내가 어떨 때 그렇게 보이는지.”
하지만 막연히 ‘그냥 그렇게 느낀다.’는 가벼운 대답뿐 이렇다 할 설명을 들은 기억은 없었다.
뛰어난 지적 능력은 물론 민감한 감수성과 통찰력을 겸비한 그녀는 나의 질문에 답변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대답했다.
“음, 호기심이 많고, 호기심은 어린애들이 많잖아요. 생기가 있고, 뭔가에 대한 관심과, 그리고 그 뭐랄까······”
잠깐 말을 끊은 그녀는 덧붙였다.
“ 샘의 그러한 배경에는 관조가 있어요.”
“좋은 말은 다 하네요.”
“나이 든 사람은 대부분 없는 걸 샘은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는 함께 웃었다. 이럴 때야말로 나이를 잊는다.
나에 대한 그녀의 평가를 부정하진 않았다. 이제 내가 대답할 차례였다.
“세상의 흐름은 이해할 수 있잖아요. 아이는 자라는 것이고 나이 듦은 수용해야 하고. 나 또한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이므로,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내게도 마찬가지이고. 이처럼 단순하게 세상 이치를 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죠.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한 치 앞도 모르죠. 아무것도 모르죠. 그래서 내가 모르는 새로운 무엇을 만나면 호기심이 생기는 거 같긴 해요.”
그녀는 내 말에 수긍하며, 자기도 한 때 ‘모른다’는 닉네임을 사용할 정도로 ‘모름’에 빠져있었다고 말했다. 이점도 그녀와 내가 닮았다.
대화를 이어가던 어느 지점에서 그녀는 나를 향해 또 이렇게 물었다.
“아니 왜 그걸 몰라요?”
“난 원래 생각이 없어요. 머리가 비었어. 빈 여자야.”
그녀는 박장대소했다.
심리학 박사인 그녀는 섬세한 관찰력과 긍정적 시선으로 나의 기질과 성향을 있는 그대로 봐주었지만, 나이답지 않은 나의 ‘맹함’(이 표현이 차라리 낫다)은 때로 남에게도 나에게도 불편할 때가 꽤 있었다. 눈치도 없고 실수도 잦아 남편은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애 취급하듯 했다. 마음과 달리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 오해를 받는 때도 더러 있었다.
따라서 야무지지 못하고 순발력도 센스도 없는 나 스스로를 자책할 때가 많았다. 나같은 부류의 여자는 경쟁적 사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뭔가 도움이 될 거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아끼는 똑 소리나는 친구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네가 누구한테 사기당할까 봐 걱정돼. 너를 속이기는 정말 쉽거든.”
다행히 운이 좋았는지 크게 사기를 당한 적은 없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알아서 멀어졌을 테고, 당연하게도 주변엔 내게 호의적인 사람만 남아있다.
그녀는 내게 소중한 한 사람이다. 나도 잘 모르는 내 장점을 짚어주고, 보통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나의 단점도 나만의 개성으로 인정해주었다. 서로의 정신적 가치를 토로하는 한편 내면의 감성들을 나누면서 피드백도 주고받는, 그녀와 같은 친구는 내 인생에 풍요로움을 더해준다. 그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