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저녁을 먹으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차주 되시죠? 제가 댁의 차를 살짝 받았어요. 좀 와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30대 전후의 젊은 여성이 당황한 모습으로 내 차 옆에 서 있었다. 주차된 자기 차를 빼려다가 내 차를 살짝 긁었다고 했다. 내 차는 눈에 띄게 찌그러진 건 아니지만 범퍼 좌측 모서리에 새카만 얼룩이 사람 얼굴 크기만큼이나 묻어있었다. 차가 은색이어서 얼룩이 더 선명했다. 내 차는 연식이 오래됐으나 외면상 깨끗한 편이었다.
나와 18년을 함께 한 내 차는 이제 그만 부려먹으라는 듯 최근 들어 자주 이상신호를 보냈다. 그래서 근거리만 조심조심 운행하면서 신차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요즘은 신차가 출고되려면 1년 가까이를 기다려야 한다. 어찌 됐건 나는 신차가 나올 때까지 기존의 차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다.
내 차는 머지않아 폐차장으로 갈 운명이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차의 상처에도 놀라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우리 아파트 주민은 아니고 지인의 집에 왔다 간다는 그녀는 덤덤한 내 태도에 안도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보험으로 처리할까요? 아니 괜찮으시다면 현금으로 드리면 좋겠어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런 경우에 없었던 일로 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찜찜함으로 남을 것이다. 나름 적정한 금액이라고 생각하며 10만원이면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내 말에 순간적으로 놀라는 것을 나는 눈치챘다. 자기가 예상했던 액수에 훨씬 못 미친다고 생각한 것 같다.
“ 그럼 15만 원 드릴게요. ” 하더니, 내가 제시한 금액의 50프로를 더해서 내 통장으로 바로 입금해주었다.
뜻밖에 현찰이 생긴 나는 기분이 좋았다. 사실 그 금액으로 얼룩을 제거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는 했다. 지우다 보면 생각보다 난이도가 커서 오히려 금액을 초과할 수도 있었다. 물론 금액을 초과하면서까지 수리할 마음은 지금은 없다.
일차적인 결론은, 내게 '공돈'이 생겼다는 점이다. 그녀 입장에서도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들이받은 차가 오래된 차였고(고급 외제차였다면 어쩔 뻔 했나.), 차주가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아 생각보다 적은 금액으로 즉시 해결됐으니 말이다. 오늘은 그녀에게나 내게 운 좋은 날이었다. (물론 차를 긁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다.)
다만 20년 가까이 무사고로 나를 싣고 다닌 나의 애마를 얼룩진 모습인 채로 보내야 할지 그건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