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가는 중이다
*나이라는 친구가 바짝 다가와 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때의 기록이다.
거실에 놓인 화분에 영산홍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수많은 작은 나비들이 한데 모여 재잘거리는 듯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기 전, 하루에 수차례씩 나는 이 귀여운 나비들의 재잘거림을 보고 또 듣는다. 어느 날, 제한된 공간에서 서로 몸을 부딪고 있는 꽃송이들 틈새를 비집고 푸른 잎이 고개 내미는 걸 보았다. 그러고 보니 뾰족한 새 잎들이 벌써 꽃송이 사이사이에 제법 나와 있었다. 화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들어 떨어진 꽃송이는 아직 한 개도 없다. 이 꽃들이 만개한 지는 한 달쯤 된 것 같다. 제 몸이 생겨난 바로 그곳에서 새 잎이 자라는데도 분홍빛 꽃송이는 처음 피었을 때의 색깔과 모양이 그대로다.
그러나 푸른 잎사귀가 자라면서 4월이 가고 또 새로운 달이 오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가면 이 고운 꽃들은 사라질 것이다. 곧 세대교체다. 하지만 꽃은 슬퍼하지 않는다. 새로 태어난 푸른 잎들은 내년 이맘때면 바로 자신과 똑같은 꽃을 다시 피워낼 희망이기에. 그래서 꽃송이들은 목숨이 다하는 그때까지 건재하고 싱싱하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합리적인가. 피었기에 지고, 졌기 때문에 다시 피어나는 그 이치 말이다.
우리 집 현관 입구에는 인조로 된 꽃이 놓여있다. 그 꽃은 결코 시드는 일이 없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똑같은 자리에서 자기와 꼭 닮은 꽃을 피워낼 도리는 영원히 없다. 생화는 아름답고 조화는 매력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이든 무엇이든 그 존재에 변화가 없이 무한히 지속된다면 지루하고 징그러울 것임에 틀림없다. 처음엔 아기자기하고 산뜻한 모양이 예뻐서 가져다 놓았지만 잎이 시드는 법도, 꽃이 지는 법도, 저 스스로는 도무지 눈곱만큼의 변화도 할 줄 모르는 그 인조 꽃은 머지않아 지겨움을 안겨줄 것이다. 그때쯤이면 나는 직접 산 그 영혼 없는 꽃을 내 손으로 내다 버릴 수밖에 없다.
몇 달 전 일이다. 눈에 자주 통증이 있기에 이상이 있나 해서 안과에 갔다.
"노안이 오는 겁니다."
검사를 마친 의사의 말은 내게 충격이었다. 진료실을 나와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마치 의사가 내게 엉뚱한 병명을 던져준 것만 같았다. 30대 젊은이에게 70대의 노인 옷을 걸치게 했을 때의 기분 같다고 할까? 아직은 ‘늙어간다.’는 체험(?)은 한 번도 인식하지 않았기에, 아직은 젊다는 기분으로 살았기에 의사의 지적은 더 황당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에게 노(老)라는 글자가 붙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생소했다. 당연히 씁쓸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내가 노년의 문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눈가의 잔주름과 머리카락의 새치도 하나 둘 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늙었다.’는 생각은 상상으로도 해보지 않았다. 자연의 변화에는 감동하면서 내 육신의 변화는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게 붙여진 ‘노안(老眼)이란 단어가 그렇듯 낯설었던 까닭은 ‘늙음’이라는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 됐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 몸의 노화는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게 진행되고 있었다. 탄력 잃은 피부, 손등의 잔주름, 계단을 오르내릴 때 무릎의 시큰거림, 잦은 몸살기, 게다가 앞으로 치러야 할 더 많은 갖가지 잔병들... 휴~ 인간의 몸은 왜 이렇듯 구질구질한가. 꽃처럼, 혹은 새들처럼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깔끔하게 살다가 한 순간에 사라지면 좀 좋은가.
불가에서는 인간의 몸을 헌 누더기에 비유한다. 새 옷은 반드시 낡게 마련이다. 닳고 헤진 곳을 꿰매고 덧대더라도 영구적으로 입을 순 없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다. 고치고 수리하더라도 때가 되면 버려야 한다. 수많은 누더기들 가운데 한 개의 누더기가 사라졌더라도 아무런 표가 나지 않는다. 숲 속의 나무 하나, 수많은 들꽃들, 그중 하나가 베어지거나 꺾어져도 조금의 흔적도 못 느끼는 것처럼 사람 또한 그렇다. 노화를 수용하고 싶지 않던 나는 그동안 착각했던 것이다. 마치 영원히 젊음이 유지된다는 듯이 말이다.
꽃과 잎의 세대교체의 시작을 보면서 알았다. 한 철 피었다가 지는 영산홍과 사람의 일생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사람도 자연의 한 개체일 뿐이라는 진리를 이젠 받아들일 나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