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집 주변으로 느긋한 산책길에 나선 나는 사람의 발길이 덜 닿는 한적한 곳에 이르렀다. 몇 발작 앞 낮은 야산 둔덕에서 한 아주머니가 허리를 굽힌 채 뭔가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쪽으로 가 보았다. 초로의 아주머니가 조그만 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분이었지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뭘 심으셨나 봐요”
“심었으니까 따죠.”
여린 머윗잎을 한 잎씩 따던 그분의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모르는 사람인 나의 관심이 불편을 끼쳤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아주머니의 불만이 이어졌다.
“남들이 다 캐갔어요. 심어놓고 자라기도 전에 다 뽑아간다니까요. 이것 보세요. 파도 다 뽑아가고 없잖아요. 나는 더 자란다음 먹으려고 엊그제 김치 담글 때도 파를 사다가 했는데······.”
아주머니의 기분이 이해되었다. 퉁명스러운 말투는 나를 향한 게 아니었고 남이 심은 작물을 양심 없이 가져가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다. 손수 일군 ‘손바닥’만 한 땅에 그분은 조금씩이나마 식물을 골고루 파종하는 모양이었다.
“속상하시겠어요. 기껏 가꾸셨는데 밭에 와보니까 텅 비어있으면 화나죠.”
내가 공감해 주 하자 아주머니는 기분이 좀 풀렸는지 하소연하듯 심정을 털어놓았다.
“아주 배낭 짊어지고 다니며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들깨도 심어보고, 호박, 고구마도 심어봤지만 그때마다 여물기도 전에 따가는 통에, 내가 맨날 남 좋은 일만 하는 꼴이에요. 하도 사람들이 가져가서 지금은 녹두를 심었어요. 녹두는 한 개씩 따야 하니까 가져가기 어렵겠죠. 처음엔 이 주변에서 세 사람이 밭을 일구었는데, 시 땅이라서 주변에서 민원이 들어가고 뭐 좀 심어봐야 남 좋은 일만 하니까 다 그만두고 지금은 나만 하고 있다오.”
아주머니의 말벗상대를 좀 더 해주었다. 붓다는 ‘남이 주지 않는 물건은 갖지 말라’고 했다. 나는 인연 있는 스님에게서 오래전에 들은 얘기를 가끔 떠올리곤 한다.
그 스님이 자전거 한 대로 홀홀 단신 인도 여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 날 이른 아침, 신혼부부였던 집주인이 지갑을 주웠다며 돌려주더라는 것이다. 물론 스님 지갑이었다. 스님은 곰곰 되짚어봤지만 전날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혹시 이 부부가 전날 밤 지갑을 훔쳤다가 아침이 되자 마음을 바꾸어 되돌려준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아무튼 고마웠고 지갑에 돈도 그대로였다.
인도에서의 스님의 두 번째 경험은 더 극적이었다. 음료를 사 마시려고 가게에 들어간 스님은 허리에 찬 전대를 잠시 풀어놓았다. 매우 더운 날씨여서 허리가 땀으로 축축했기 때문이다. 가게에서 나온 스님이 한참을 왔는데 누군가 뒤에서 자전거를 타고 급히 달려오며 손에 뭔가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유 패스포트! 패스포트!”
그때까지 스님은 여권과 여행 경비 전액이 들어있던 전대인 패스포트를 가게에 두고 왔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역시 패스포트의 내용물은 조금도 손을 탄 흔적이 없었다. 그때 스님은 감동하며 “내가 남의 물건을 탐하지 않으니 남도 내 물건을 탐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남의 물건이란 내 소유가 아닌 모든 대상을 말한다. 길에 떨어진 동전 한 개, 담 너머로 뻗어 나온 남의 집 감나무에 열린 감 한 개도 주인의 허락 없이 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큰 욕심도 작은 작은 욕심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남이 심어놓은 파 몇 뿌리나 호박 한 개 따간다고 해서 뭐 그리 대수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요는 가져가는 그 사람의 ‘이것쯤이야’라고 생각하는 마음 상태다. 주인 허락 없이 가진다는 것은 분명 훔치고자 하는 탐심의 작동이며, 기껏 가꾸고 수확을 기다리는 사람의 실망은 안중에도 안 두는 몰인정하고 이기적인 발상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다. 또 ‘병아리 도둑이 낙타 도둑 된다’는 이란 속담도 있다. 작은 양심부터 지켜야 한다는 경계의 가르침이라고 본다.
글을 쓰다 보니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진정 양심의 가책이 없을 정도로 살아왔는가? 백 프로 장담하긴 어렵다. 다만 탐심이 일어났더라도 그것을 행위로 옮긴 적은 거의 없는 듯하다. 이번 생에선 분명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럼데도 뜻밖의 꽤 큰 금전적 손해를 입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남의 물건을 탐하지 않으니 남도 내 물건을 탐하지 않는구나.”는 내겐 해당되지 않는다. 아마 전생에 남에게 금전적 피해를 입혔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나는 과거생에 지은 잘못까지 만회하려면 이생에서 정말 잘 살아야 한다. 나의 생각, 말, 행위 등, 내게서 표현된 모든 것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연결되어있다. 과거는 현재를 낳고 현재는 미래를 낳는다. 현재의 내 삶의 방식이 중요한 이유다. 미래의 행불행도 현재의 내게 달려있다. 삶은 일정 부분, 아니 많은 부분에서 선택 가능하다고 본다. 자기 마음을 깨끗이 가져갈 것인가 얼룩 투성이로 만족할 것인가도 개인의 선택이다. 내 노동을 보태지 않은 남의 밭에서 무 하나 뽑을 것인가 뽑지 않을 것인가부터 선택의 시작이다.
나이 들어 소일 삼아 가꾼 상치, 호박, 깻잎을 가끔 식탁에 올리는 기쁨을, 지나가는 염치없는 누군가가 아닌, 직접 심고 키운 주인들이 맛보게 되길 바란다.